박평호 차장, 아니 이정재 감독에게 우선 놀랐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지난 10일 개봉한 '헌트'는 관객을 만족시키고 싶었던 그의 고민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흥미진진한 첩보전이 무려 120분 동안이나 쉴 새 없이 이어질 줄은 예상 못했다.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호평 속에서 어느 정도 기대감을 안고 영화를 감상했음에도, 그 예상마저 뛰어넘는 수작에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한편으론 이런 재능을 왜 이제야 세상에 드러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다.
헌트는 첩보 액션물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는 이유는 철저히 장르에 충실한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생애 첫 시나리오로 메가폰까지 잡은 만큼, 이것저것 욕심을 부릴 만도 한데 곁길로 새지 않고 우직하게 직진을 택했다. 영화를 평가하는 다양한 기준 중 '얼마나 장르에 충실했느냐'로 따진다면 딱히 흠잡을 데 없는 수작이다. 끝까지 한 곳만 응시한 '감독 이정재'의 집중력과 완급조절이 인상 깊다.
영화는 1980년대 안전기획부(現국가정보원)를 중심으로시대 상황을다룬다. 물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각색 실화(팩션)다. 차장급 요원인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가 조직 내부에 침투한 스파이를 색출하려는 과정에서 서로를 의심하며 대립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감독 이정재'는 '현재의 두 남자'를 있게 한 '박평호와 김정도의 과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동시대(同時代)를 다룬 여타 작품들처럼 '군부독재의 폐해'나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을 적극적으로 조명하지도 않는다.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질 법도 한데, 마음을 비우고 첩보 액션에 초점을 맞췄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관객으로서는 고마울 뿐이다.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전혜진·허성태의 연기도 각자의 캐릭터에 잘 녹아들었다는 평가다. 유독 정부 관계자나 경찰등 국가직 공무원역할을 맡을 때마다 분위기가 남달랐던 전혜진은 딱히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영화 '밀정(2016)'에서 인상 깊은 연기로 주목받았던 허성태는 이번 작품에선 이정재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캐릭터의 정체성을 분석했다. 이정재 감독도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조연부터 단역까지 모든 배역이 '어색한 연기'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촬영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과 상황 설명에 공을 들였다고 밝힌 바 있다.
박평호의 해외팀과 김정도의 국내팀이 서로를 감시·미행·정보수집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더하는 음악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다. 가장 최근의 작품인 '헤어질 결심(2022)'을 비롯해 '공작(2018)', '아가씨(2016)', '내부자들(2015)', '신세계(2013)', '범죄와의 전쟁(2012)' 등에 참여했던 조영욱 음악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현실에서는 오랜 세월신뢰를쌓아온 두 배우가 영화 속에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는설정도 흥미롭다. 그간 미디어에 공개된 사적 친분을 포함해 처음으로 공동 주연을 맡았던 '태양은 없다(1998)'로 인한 기시감을 차단하려 했다면 제대로 적중했다.
극 중 박평호(이정재)와 김정도(정우성)는 결국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들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시야각이다.
우선, 김정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고 돌진하는 탱크 같은 인물이다. 현시점에서 가장 우선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반면, 박평호는 다양한 상황에서 매번 고뇌한다. 설정한 목표에 변수가 생기면 고심 끝에 목적지를 변경하기도 한다. 이는 이번 작품에서 비교적 배우로만 집중할 수 있었던 정우성과 달리, 4년 동안 연기·시나리오·연출을 모두 고민하면서보완·수정을반복해야 했던 '현실의' 이정재와도 일부 겹치는 모습이다.
개인적 견해로 아쉬운 점은 '묵직한 카메오'들의 빈번한출연이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감이다. 한두 명의 출연까지는 반가움이 더 크겠지만, 타 작품에서 주연이나 '중요한 조연'으로 열연을 펼쳤던 배우들이 쉴 새 없이 단역으로 출연하는 상황은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 이정재 감독도 한 유튜브 방송에서 이들의 출연이 진심으로 고마웠지만, "유명한 분들이 영화 중간마다 계속 나오면 관객의 몰입감이 끊기지는 않을까" 걱정했다고 당시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참고로 필자의 눈에는 단 한 명을 제외하면 크게 몰입을 방해하는 배우는 없었는데, 이 또한 '감독 이정재'가 그들의 역할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이다.
물론, 코로나19 방역을 이유로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한 사정이 있었지만,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해외 분량을 현지에서 촬영하지 못한 일정도 다소 아쉽다. 단순히 현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국내는 최대한 비슷하게 꾸며도실제 장소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한정된 공간만 카메라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CG)의 도움 없이는 가급적 와이드 앵글을자제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해외를 배경으로 한 시퀀스는 종종 화면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