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번호가 뜨질 않아.”
“내가 한번 해볼게.”
“전체 번호가 떠야 하는데 두세 개 밖에 뜨질 않잖아.”
“어어. 어찌하다 보니 전체 번호가 뜨네.”
제주의 어느 아파트 앞에서 우리 부부가 나눈 대화다. 지인의 별장으로 쓰는 아파트를 빌려 며칠 동안 제주에 머물 예정이었다. 푹푹 찌는 여름 날씨에 습한 바닷바람까지 불어와 현관문을 여는데, 도무지 비밀번호를 누르려해도 한두 개 번호만 보이니 짜증이 인다. 게다가 아파트는 왜 이리 높은 곳에 있는지, 캐리어를 들고 언덕배기를 오르느라 힘이 다 빠졌다. 나중에 알아보니 보이는 번호를 하나씩 누르면 전체 번호가 뜨는 시스템이란다. 지문 문제로 그렇게 한단다.
거실에는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었다. 우리 집 텔레비전처럼 눌러보았다. 한참을 눌러도 텔레비전이 나오지 않는다. 허영만의 <백반 기행>이 나왔다. 종일 그 프로그램만 보았다. 그다음 날 딸이 와서
“지니야, 텔레비전 틀어줘.”
하니 갑자기 그 보고 싶던 텔레비전 방송이 나오는 게 아닌가?
“어디 내가 한번 해봐야지.”
남편이 신이 났다.
“지니! 9번 틀어봐라.”
남편의 말은 먹히지 않았다.
“아니, 사람 차별하니? 왜 지니는 내 말을 듣지 않는 게야?”
며칠 전에 제주의 그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이번엔 내 말을 듣겠지.”
“지니! 텔레비전 틀어라!”
“.......”
“ 아니 요 녀석이 또 내 말을 듣질 않네.”
내가 다시 지니에게 부탁한다.
“ 지니야, 텔레비전 틀어줘.”
텔레비전이 켜졌다.
사위가 자주 커피 쿠폰을 보내준다. 거의 딸과 함께 별다방에 가니 내가 주문을 할 일이 없었다. 딸이 외국에 있어서 이번엔 내가 주문해 보았다.
“톨, 그란데, 벤티 말씀하세요.”
“뭐라 하셨어요? 좀 천천히 말씀해주실래요?”
“작은 거, 중간, 큰 거 중 어떤 거 하실래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를 짜증스럽게, 위아래로 쳐다보며 종업원이 설명해준다.
‘이건 뭐 영어도 아니고, 꼭 이탈리아 말을 써야 커피 맛이 나나?’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디지털 시대에 살아가자니 먹는 것, 주차하는 것, 쇼핑하는 것, 은행에서 돈 찾는 것 모두 손가락으로 터치하며 살아간다. 게다가 우리말을 쓰지 않고 외국어를 써야 커피도 얻어 마시는 세상이다.
‘틀딱’이란 용어가 있다. ‘틀니’와 딱딱'을 합쳐서 ‘틀딱’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 청년층과 정서적으로 괴리되어 극우, 수구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노인들을 비하하는 말이다. 틀니를 끼고 지껄이는 소리가 ‘딱딱’ 난다고 해서 생긴 말이다. 사실 ‘틀딱’이 생기기 이전에는 이와 비슷한 것으로 나이를 곱게 먹지 못한 어른들을 비하하는 은어로는 '꼰대'와 비슷한 어감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하철에 경로석에 어떤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노인 한 분이 화를 내며 왜 이곳에 앉아 있느냐고 대뜸 소리를 지른다. 지하철 타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분은 장애인입니다. 제가 이분을 모시고 다니는 사람이고요. 여기 증명서도 있어요.”
‘왜 이렇게 쓸데없는 참견을 해서. 쯧쯧. 그러니 꼰대라고 욕을 먹지.’
혼자 쓴웃음을 삼킨다.
나는 나이 들면서 변화하는 세상을 탓하기보다는 나를 변화시키고 공부하는 편이다. 요즘 추세를 익히려고 최신 책도 사서 읽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도 하고 있다. 컴퓨터 관련 자격증도 4개가 있다. 딸은 대학원에서 미디어 관련으로 전공인데, 졸업을 앞두고 있다. 특히 미디어 관련해서 전공 서적으로 과제를 할 때 찻집에서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즐긴다. 내가 숙고하고 교류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나의 ‘페르소나’를 구축하려 한다. 그것은 글을 쓰는 일일 수도 있고, 젊은 세대와의 교감을 위한 노력일 수도 있다.
애플이 생산 원가에 비교할 때, 판매가가 매우 높다 한다. 자체 인터페이스는 물론 환경이나 보안, 그리고 마케팅에 들어가는 노력으로 보아,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서두르지 않고, 그 식당만의 독창적인 맛을 내는 노력을 하듯이 우리 자신도 전문성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생존을 위한 공부보다는 독창성과 전문성을 위해 노력한다면 ‘틀딱’과 ‘꼰대’라는 용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딸이 대학 시절 엄마를 제일 존경한다고 했다. 딸이 한 그 말에 오히려 내가 더 감동하고 각성했다. 그 말 때문에,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세월이 들어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냥 늙는 게 아니고 그냥 사는 게 아니다. 그만큼의 차별화되고, 전문화된 지식으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간다는 것, 조금씩 익어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