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무리 생각해봐도 산타할아버지가 엄마인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우리 딸이? ”
“컴퓨터로 쓴 글이잖아. 엄마 글씨는 내가 알아볼 수 있는데, 엄마가 산타할아버지인 거 숨기려고, 일부러 컴퓨터로 쓴 거 같아.”
초등학교 4학년 성탄절 무렵, 딸과 나눈 대화이다. 요즘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산타가 누구인지도 알고, 산타클로스에 대한 전설을 믿지 않는다. 딸은 순진한 건지 어수룩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파티를 해주었다. 같은 반 아이들을 초대했는데 딸이
“언니, 이리 와 봐.”
하며 몇 명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딸을 몰래 따로 불러 왜 ‘언니’라고 부르는지 이유를 물었다. 딸이 유치원 다닐 때 지금 같은 반 아이들이 모두 형님 반에 있어서, 언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딸이 2월생이다 보니 생긴 일이다. 같은 반 친구들은 언니가 아니고 모두 친구니까 이제부터는 언니라고 부르지 말라고 호칭을 정리해주었다.
<타이타닉>을 보려고 영화관에 갔다. 중학생 이상 관람이 가능한 영화였다. 한국에 처음 상영되는 때라서 줄이 길게 늘어섰다. 딸은 그 당시 6학년이어서, 딸에게 누가 물어보면
“중학생이에요.”
라고 대답하라고 시켰다. 한 시간여를 기다렸다. 긴장한 딸에게 매표원인 듯한 이가 다가섰다.
“너 몇 년 생이야?”
“......”
우리 부부와 딸은 그날 <타이타닉>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걷기도 빠르고, 한글도 빨리 깨치고, 공부도 우수한 편인 딸이 생각만큼 야무지지 못한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딸이 오학년 때, 한 번은 집 열쇠를 잃어버려 내가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 옆에는 딸의 친구도 있었는데 그걸 깨닫지 못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딸은 정말 내게 미안해했다. 그 당시엔 내가 다른 일로 지쳐서 딸에게 공연히 화를 냈지만, 딸의 친구 앞에서 딸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에 속상했다. 괜히 겸연쩍어서 몇 달 지난 뒤에 그 일로 사과를 했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딸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혼자 오피스텔에 떨어져 사는 일도 버거웠겠지만, 청소며 허드렛일 한번 하지 않았던 딸이 막내 승무원으로서 해야 할 거친 일들은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이 간다.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고객에게 서비스하고, 클레임 들어올까 불안해하고, 선배들과의 인간관계도 조심하고, 안전과 닥칠 수 있는 온갖 상황과 불특정 다수의 고객에 대처하는 일은 늘 긴장된 시간이었으리라. 언젠간 새벽에 출근하는데, 머리를 드라이하다가 머리가 돌돌 감겨서 풀지를 못해서 119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 일들을 일체 내게 알리질 않았다. 근무 중 카트에 다치거나, 화상을 입기도 하고, 병원에 갈 만큼 부상을 입었어도, 부모에게 연락 한 번을 하지 않았다.
“너는 그렇게 다급한 일이 있었는데 왜 연락하지 않았어?”
“엄마가 걱정할까 봐 그랬지.”
“부모는 같이 걱정해주라고 있는 거야.”
딸이 서른이 넘어가면서 결혼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딸! 엄마가 정년퇴직하기 전에 결혼했으면 좋겠다. 엄마가 퇴직하면 사람들 부르기도 그렇잖아.”
은근 딸에게 협박했다. 딸은 마음이 여려서 엄마 말을 들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여러 사람을 소개로 만나고, 선을 보기도 했다. 결혼은 마음먹은 것만큼 쉽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정년퇴임을 했다.
“엄마! 나 정말 힘들었어. 엄마 말대로 엄마 퇴직 전에 결혼하려고 많이 노력했어. 엄마가 원하는 직업의 남자를 배우자로 택하려고도 했지. 그런데 정말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어.”
딸은 내가 퇴임한 이년 후에 정말 괜찮은 남자를 만나, 남부럽지 않게 성대한 결혼식을 했다. 야외 결혼식으로 아주 적은 인원의 하객들만 참석했다. 이상적인 결혼을 하게 된 딸을 정말 축복한다. 이제 생각해보니, 전에 딸에게 내가 한 협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덕목, 의무 등에 따라 자신의 본성 위에 덧씌우는 사회적 인격을 페르소나라고 명명했다. 얼마 전 <페르소나>라는 스웨덴 영화를 보았다. 유명한 연극배우인 엘리자베스가 공연 중 말을 잃게 되고, 병원을 거쳐 요양을 떠난다. 그녀와 동행한 간호사 알마는 엘리자베스를 동경하고 닮고 싶어 한다.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나중에 알마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관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 후 알마는 공격적인 자세로 변하게 된다. 알마는 마치 엘리자베스가 된 듯 그녀의 인격으로 말을 하고 행동한다. 알마는 점차 엘리자베스와 닮아가다가 두 인격이 겹쳐지는 듯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 영화는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이다. 엘리자베스는 환자이고, 알마는 치료를 돕는 간호사인데, 둘의 관계가 역전이 되어 알마가 환자이고, 엘리자베스가 치료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도 있다.
어리숙하게 보이는 딸에게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대신 행동하고, 내가 이랬으면 하는 일을 딸에게 강요했다. 중학교 땐 시험공부를 같이 하면서 내가 시험을 보는 학생이 된 듯 딸과 함께 공부했었다. 문제 해결 상황에서 딸의 의사결정을 대신하기도 했다. 어렸을 적 신문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딸에게 투사되어, 딸은 회사 내 영어신문의 편집 일을 맡기도 했다. 딸은 맹목적으로 엄마를 잘 따라왔다. 마치 알마가 엘리자베스를 동경하고 마음을 털어놓듯이. 매사에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순조롭게 순항했다. 그러나 딸은 성숙해지면서,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나름의 철학으로 헤쳐나갔다. 엄마 옆에서 착한 딸 노릇을 하려고도 했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로 선택했고 혼자 고생도 감수해냈다.
이제는 강해진 딸을 보며 내가 그녀를 쳐다본다.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영롱한 아침이슬처럼 눈부신 젊음을 부러워하면서.
“엄마, 눈 화장은 이렇게 하는 거야.”
“엄마, 밥은 적게 먹고, 단백질 위주로 먹어야 해.”
“엄마, 엄마는 환한 색 옷이 잘 어울려.”
“엄마! 오늘 운동했어?”
“엄마는 핑크 립스틱이 얼굴과 잘 맞아.”
딸이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대학원 과제를 하면, 나도 노트북을 꺼내 함께 글을 쓴다. 젊은 딸처럼 생기발랄한 모습을 동경하고 닮고 싶어 한다. 마치 알마와 엘리자베스의 상황이 역전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