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리뷰) 사이코지만 괜찮아>
사랑에 관한 조금은 이상한 로맨틱 코미디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배경은 정신병원이다. 그래서 정신질환을 앓는 다양한 환자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인생에서 닥친 큰 상처와 불운을 피해 가지 못한 사람들이다. 환자는 아니지만 역시 가슴속에 큰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가진 동화작가 고문영, 그리고 자폐 스펙트럼을 앓는 형을 돌보는 정신병동 보호사 문강태이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태생적 결함을 가진 여주인공이 동화를 쓰고, 자기 자신은 돌보지 못하는 남주인공이 장애가 있는 형과 환자들을 돌본다. 인물 소개에서부터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사랑의 온기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고문영은 화려한 의상과 과한 악세사리로 자기 과시적인 패션을 즐긴다. 그녀는 대개 무례하고 공격적인 말로 상대를 몰아세운다. 상대방이 당황하고 위축되고 결국 도망가는 순간까지 이미 예상하면서 말이다. 그런 그녀는 어린 시절 항상 혼자였다. 심지어 다가오는 사람에게 겁을 줘 도망치게 만드는 데 선수였다. 그녀가 사람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외로움 속에 가둔 이유는 차차 드러날 것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로는 정상적이지 않은 엄마에게 삐뚤어진 사랑을 받았으며 아빠가 자신을 목 졸라 죽이려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왜 동화를 쓰는 것일까. 그녀에 의하면 동화는 현실세계의 잔혹성을 역설적으로 그린 잔인한 판타지이다. 동화는 꿈을 심어주는 환각제가 아니라 현실을 일깨우는 각성제이니 동화 많이 읽고 꿈 깨라는 말도 한다. 나는 그녀의 이 오만하고 냉소적인 말이 굉장히 반어적으로 들렸다. 그녀는 신랄하고 공격적인 모습을 띠고서 현실의 잔인함을 너무 일찍 깨달은 자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동화를 쓰는 이유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내 눈에 그녀는 사이코가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으로 보인다.
동화 “악몽을 먹고 자란 소년”에는 자조적인 어조의 한 마디가 나온다.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 처절하게 후회했던 기억, 남을 상처 주고 상처 받았던 기억, 버림받고 돌아섰던 기억, 그런 기억들을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살아가는 자만이 더 강해지고, 더 뜨거워지고, 더 유연해질 수 있지. 행복은 바로, 그런 자만이 쟁취하는 거야.. 이겨내지 못하면 너는 영혼이 자라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야.”
안 좋은 기억일수록 가슴에 오래 남는다고 하던 그녀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아픈 기억 속에서 빨리 치유되길 바라는 것 같다. 그 간절한 소망은 동화 속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좀비 아이”에서는 좀비로 태어난 아이를 키우다 끝내 자신의 몸을 식량으로 내어주며 죽어가는 엄마가 나온다. 처음으로 엄마를 끌어안은 아이는 말한다. “엄마는 참 따뜻하구나.” 이번에도 문영은 동화 속 해설자의 목소리를 빌려 질문한다.
“아이가 원했던 건 고기였을까, 온기였을까.”
강태는 문영에게 네가 원했던 것이 온기 아니냐고 묻지만 그녀는 부인한다. 하지만 그녀는 화가 나서 폭발하기 직전에 강태가 자신에게 다가왔던 따뜻했던 순간들을 곱씹으며 비로소 진정된다. 그녀가 다가오는 사람을 위협하고 공포스럽게 만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해줄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던 것 같다. 그녀의 결핍은 그녀를 공격적으로 만들었고 따뜻한 온기를 원하는 본심은 완벽하게 숨겨진 것이다.
강태의 절친 재수는 강태에게 눈은 슬픈데 입은 웃고 있다며 조커 같다고 한다. 그만큼 강태를 잘 표현하는 말이 있을까. 고된 삶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본심을 엄청난 책임감으로 누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매년 봄마다 발작을 일으키는 형과 이사를 다니다 보니, 1년이 넘어가는 관계를 맺지 않는 지나친 강박에 갇혔다. 그의 돌아가신 엄마조차도 형을 돌봐주고 지켜주라고 강태를 낳았다는 망언을 했다. 아픈 형을 돌보는 엄마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자란 강태는 따뜻한 온기를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의무와 책임만을 다하며 기계처럼 살 뿐이었다.
“위선자.”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문영의 눈에 강태는 위선자다. 강태는 숨기고 싶고 내색하고 싶지 않았던 본심이 문영에 의해 간파될 때마다 짜증이 나 피하고 싶어 진다. 그러다 문득 자기도 모르게 나도 너와 놀고 싶다는 말을 하고는 깜짝 놀란다. 강태는 다시 본심을 억누르고 문영을 향해 너처럼 감정이란 것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가시 돋친 말을 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문영을 보고도 애써 외면한다. 뒤늦게 문영에게 큰일이 있었음을 전해 듣고 강태는 걱정되는 마음에 무작정 뛰쳐나간다. 휴대폰도 지갑도 챙기지 않고 뛰어나간 강태는 처음으로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자신의 마음을 따르기보다 도망치는 것이 편했던 강태는 앞으로 문영이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에 조금 더 솔직하게 다가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두 가지 종류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첫째, 결말이 어찌 될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는 예측불허의 드라마. 둘째, 결말이 빤히 보이는데 그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참신하고 재미있는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후자인 것 같다. 주인공인 두 남녀는 결국엔 서로를 치유하고 서로를 구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욕망을 채우며 살았으나 늘 허기졌던 여자와, 욕망을 숨기는 데 급급해서 자신을 잊어버린 남자가 만들어가는 조금 이상한 사랑이야기의 관전 포인트는 사랑의 온기가 가진 놀라운 힘일 것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기사로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