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싫은데, 너는 나를 좋아한다. <3화>
다른 이윤 없었다. 그냥 오늘은, 커피가 마시고 싶었을 뿐이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란히 자리했다. 커피에 물기와 김이 각자의 매력을 뿜어냈다. 그의 커피 열이 내 커피 속 얼음을 빠르게 녹이는 듯했다. 그는 달려오느라 목이 탔던 모양인지 물을 따로 받아와 한 번에 들이부었다.
"아, 죄송해요. 너무 교양 없었죠."
"괜찮아요."
호. 입김으로 뜨거움을 식혀 커피를 살짝 홀짝였다. 근 몇 개월 만에 카페인을 맛보았다. 신경계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던 내게 의사 아저씨가 경고해서 마시지 못했던 커피는 위험한 만큼 달콤했다.
"오늘 제가 좀 늦었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먼저 가셨겠지 했는데, 이런 거 보면 정말 운명이 있구나 싶어요."
저 사람은 저런 닭살 돋는 말을 어쩜 저리 뻔뻔하게 할 수 있을까. 성격 참 독특했다. 엄마한테조차 하지 못할 오글거리는 문장이었다.
"아, 우리 통성명해야죠! 전 유시환이에요."
"한송이예요."
"이름 예쁘다. 이런 소리 많이 들었죠?"
평소보다 말이 많은 감이 있었지만, 마주 앉아 멍하니 있는 것보단 나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커피를 머금었다. 그는 그런 나를 흥미롭게 쳐다봤다. 눈빛이 하도 따뜻해서, 그 의도가 의심스럽진 않았지만, 민망함은 여전했다.
"뭘 그렇게 보세요."
분명 의문문으로 물음표를 던지며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는데, 목소리는 수업의 여파로 둔탁했고, 표정은 일명 썩은 미소를 담아냈다. 얼마나 어색했는지, 당황한 그의 속내가 귓가를 울렸다.
'거 참 더럽게 쌀쌀맞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시환은 허둥지둥 분위기를 수습하려 손까지 저어가며 애썼다.
"미안해요. 제가 송이 씨랑 이렇게 앉아서 커피 마시는 게 꿈만 같아서 저도 모르게 히죽댔나 봐요. 근데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내가 혹여나 놀라 달아날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 맞았다. '이상하다'라는 형용사의 사전적인 뜻은 1) 정상적인 상태와 다르다 2)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지식과는 달리 별나거나 색다르다 3) 의심스럽거나 알 수 없는 데가 있다-인데 이 중 두 개가 해당됐다. 먼저 그는 오늘에서야 이름을 알게 된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인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과 현재 마주 보고 금기시되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일은 별나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 그러면 나도 이상한 사람인 건가.
"처음 뵀을 때, 커피 마시자고 했더니 그냥 가버리셨잖아요. 그래서 저 지금 엄청 기쁘거든요."
"커피를 마시면 안 되는 체질이라서요."
자기감정에 솔직한 시환이라서 나도 억지로 거짓 행동을 할 필요를 못 느꼈다. 덤덤하게 얘기해서 그렇구나-넘길 줄 알았는데, 시환은 나와 내 앞에 놓인 커피를 번갈아봤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요. 내가 결정한 거잖아요."
난 저렇게 감정 이입이 가능한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 또한 남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표정은 지을 수 있다. 다만 진심은 아니란 얘기다. 어렸을 때부터 교감이 어려웠다. 한 번은 같은 반 아이가 넘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었는데, 울음은 다른 아이들에게도 순식간에 전염돼서 난리가 났었다. 다들 옹기종기 모여 서로를 달래고 위로하고 챙겼다. 선생님들은 그 덕에 고막 청소를 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덩달아 우는 타입이 아니었다. 다친 애가 우는 건 그래, 그렇다 치자. 나머진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선생의 손을 덜어준 셈이니, 담임은 기특하다는 듯 날 칭찬했다.
'우리 송이는 친구 따라 울지도 않고, 다 컸네.'
'다친 건 쟨데, 제가 왜 울어요?'
친구가 아파 속상하니까 그럴 수 있다는 감상적인 추측을 이유랍시고 늘어놓는 담임의 말엔 설득력이 없었다. 이후에도 애들은 누구 하나가 울면 목청 세기 시합이라도 하는지 여하튼 시끄럽게 목놓았다. 이 날은 선생이 손을 베여 피가 흘렀다. 다들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울어댔다. 그래서 귀를 막았다. 망할 신경계 때문에 소음에 예민해서 머리가 지끈 거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담임이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감성 지능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흉을 봤다. 웃겼다. 언제는 기특하다더니, 정작 자기가 고통을 나누지 못하자 기분 나빠하는 꼴이 위선적이었다. 하지만 난 영악하질 못해서, 어이없음에 터져 나온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자 담임은 날 벌레 보듯 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름 끼쳐'
시환에게 왜 내 옛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무심코 튀어나왔다.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걸 숨기고 산지 어연 25년인데, 그 앞에서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약점을 드러낸 건지, 한침함이 최고치를 경신했다.
"난 그런 사람이에요. 감정까지도 머리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건 받아들였어요. 그렇지만 난 그래요."
잠자코 듣고만 있는 시환을 살폈다. 타인의 감정을 흉내 내며 살아온 내게 생긴 일종의 버릇이었다. 이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여섯 살, 어린 나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남긴 유치원 담임과 같은 심정일까. 하지만 그는 평온했다. 정신분석학자처럼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 듯 보였다.
"저랑은 다른 사람이네요."
울컥했다. 그의 한 마디가 마치 케케묵은 감정의 먼지를 확 날려준 것 같았다. 예상을 벗어난 대답에 냉소적으로 일관하던 뇌의 작동이 얼어버렸다.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그럼, 오늘, 지금, 여기, 저랑 이렇게 있는 거, 송이 씨 결정인 거죠?"
"네.."
"기쁘다. 고마워요, 그런 결정 내린 거. 다음엔 나랑 맛집 데이트하는 것도 생각해 봐요. 결정 나면 말하기. 알았죠?"
'해주다'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상대에게 선심 쓰듯 하는 태도가 껄끄럽다. 그래서 늘 '하다'로 바꾸곤 한다. '봐줄래?' 대신 '볼래?', '놀아주라' 대신 '놀자'. 도움을 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렇다고 부탁할 때까지 '도와!' 하고 명령하진 않는다. 어쨌든 시환은 내가 쓰는 표현법을 썼다. '그런 결정 내린 거'. 커피를 마시겠다고 카페에 들어온 내가 그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님을 인정했다. 자연스러운 미소가 얼굴에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