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과 똑같이, 나는 차가운 음료를, 그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음료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한참을 조용히 서로의 음료수가 너무 차갑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은 정도로 식을 때까지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복잡해서 말의 순서를 정하는 게 아니라, 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편해서, 어떻게 입을 떼야할지 되짚어봐야 했다.
"단발머리 여대생이요, 과외 알바 때 제 학생이에요. 종강했다고, 고마우니까 밥 사겠다고 해서 만난 거고."
아. 민망함도 잠시 안심이 됐다. 못됐지만, 어쩔 수 없다. 그에게 이미 누군가가 생긴 걸 축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던 묘한 심리는 내가 컨트롤하기엔 역량이 부족했다. 감정은 머리로 어떻게 안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물러졌거나.
"난 송이 씨 생각밖에 안 했는데, 오해하는 거 같아서. 풀고 싶었어요."
"... 그분 아니어도, 다른 좋은, 건강한 사람 만나길 바라요."
또 속에 없는 소리. 이 정도면 내가 가진 병은 거짓말 병이지 싶다. 마음의 소리는 속에 꾹꾹 감춰두고 세상 쿨한 척, 괜찮은 척, 남들에게 상처만 주는 거짓말로 칠해진 그런 병.
"송이 씨가 제대로 설명해주기 전엔 아무도 안 만날 거예요. 평생 독수공방 할 거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문득 표정을 살폈다. 얕게 파인 보조개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나 변탠가. 왜 자꾸 보조개만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 말투와 달리 피부는 거칠었다. 그가 얼마나 마음 졸여왔는지 한눈에 알아챘다.
"정확한 이유도 모르고 차이는 거 싫어요. 아프니까 안 된다는 건 송이 씨 선택이니까, 적어도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하게 해 줘야죠."
사람의 몸은 70%의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왜 그런가 늘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다. 세상엔 울 일들이 넘치고 흘러서, 이렇게라도 감정을 토해내라고 신체적으로 조건을 맞춰주는 거다. 안 그럼 다 말라 죽을 테니까. 고개를 치켜들어 가까스로 떨어지려는 투명한 액체를 삼켰다. 호흡을 가다듬고, 시환의 요구대로, 하나하나 모조리, 내가 왜 시환을 만나면 안 되는지, 앞으로 우리 둘의 결말을 미리 알려줬다.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잖아요. 성격도 성격이지만, 사주도 그렇대. 궁합이 잘 맞는 사람들은 보통 부모운, 재물운, 애정운이 비슷하대요. 건강운도 마찬가지일 거야. 우린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달라요. 난 부모님이 버젓이 살아계시는데도 따로 나와 살고, 시환 씨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랑 다정하게 지내. 난 일하고 있는 중인데, 시환 씨는 아직 학생이에요. 나는 사람을 무서워하는데, 시환 씨는 마음에 들면 커피 마시자고 말 걸 수 있잖아. 시환 씨는 두 팔다리 건강한데, 난 언제 어디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에요. 몸만 그런 것도 아냐.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라 정신 건강에도 해로워. 또 얼마나 계산적인데. 은형 오빠랑 시환 씨 비교 많이 했어요, 그동안. 어디로 보나 오빠가 더 안정적이더라고. 오늘은, 내가 내 발로 차에 탔잖아요. 그게 내 답이야."
나는 말할수록 심장이 진정되다 못해 멎어가는 기분이었는데, 시환은 들을수록 초조해하는 듯 보였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눈가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감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나와는 달리 눈물을 두 뺨에 흘려보냈고, 그대로 뒀다. 하지만 침착했다. 말을 끊지도, 헛웃음으로 불편한 내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표정 외엔 미동도 없었다. 주량에 맞지 않게 지나친 음주를 하게 되면, 새벽에도 몇 번이고 잠에서 깨 불편한 속을 게워내게 된다. 그렇게 하루쯤 숙취로 괴로워하다 보면, 어느샌가 두통이 말끔히 사라지고, 평소대로 돌아와 허기지다. 시환은 술과 같은 존재였다. 적당히 취했어야 했는데, 정도를 넘어서는 바람에 위도 장도 틀어져버리고, 심지어는 뇌까지 기능을 중지했다. 이제, 속을 비우고, 원상 복귀할 때다. 목을 축이고, 이어나갔다.
"난 시환 씨를 잘 몰라요. 그냥 좋았던 기억만 나. 처음엔 귀찮고 불편했는데 나중엔 내가 시환 씨랑 퇴근하는 길을 기다리고 있었어. 여전히 개미는 싫지만, 김밥은 정말 맛있었어요. 카페에서 같이 공부한 거, 그것도 처음 해본 거라 오래오래 못 잊을 거예요. 기억할 일들이 조금 더 많았으면 어땠을까 궁금하긴 해요. 근데 끝이 너무 별로였잖아요. 추하기만 했잖아. 더는 그런 거 보여주기 싫어요. 시환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억지로 일어난 피곤한 월요일 아침도 개운했으면 좋겠고, 예쁜 꽃 보고, 차분한 노래 들으면서 지금처럼 밝은 사람이길 바라. 앞으로 만날 사람들은 커피처럼 은은하고 향기로운 말만 했으면 좋겠고, 자기 전엔 하루를 아름답게 추억하면서 행복한 꿈꿀 수 있었으면 해요. 졸업 후는 불안함 대신 희망이 가득했으면, 혹시나 지치고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딱 시환 씨가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만 찾아오기를. 그래서 시환 씨가 남은 나날들을 잔잔하게, 또 따뜻하게, 때론 뜨겁게 보내기를. 그러길 바라요."
"하나 틀린 문장이 있어요."
너무 낮아서, 아니면 목이 메어서 갈라진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송이 씨한테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인 거예요."
즐기는 건 아니지만, 간혹 귀신이 훅 튀어나오는 공포 영화를 볼 때가 있다. 학습 자료가 필요해서도, 글을 쓸 때를 대비해서도 아니고, 머리 끝까지 차오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무의식 중으로 재생 버튼을 누른다. 나를 놀라게 할 장치가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수두룩하게 설정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깜짝깜짝 놀란다. 가뜩이나 들기 힘든 잠도 제대로 못 이룰 정도로 무섭다.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다. 알고 있던 건데도 찔린다.
"사랑을 할 때는, 끼리끼리라는 게 없어요. 둘 중에 하나는 1순위가 상대일 수밖에 없어. 그래야 유지되는 거예요, 관계는. 송이 씨가 계산 적인 사람이라 덜 미안하죠. 난 이기적인 사람이라, 송이 씨가 지금 여기서 나가버려도 또 쫓아갈 거거든."
"이기적인 건 시환 씨가 아니라 나예요, 그걸 지금-"
"아픈 거 부모님이 염려하시는 게 싫으니까 나온 거잖아요. 아파서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못했던 거고, 아프니까 나 밀어내는 거예요. 근데 그걸 왜 혼자 감당하려 해요, 같이 하자고. 내가 이기적일 수 있게 해 달라고요."
카페 안, 사람들은 날 보고 있을까. 아르바이트 생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어떤 끝을 맞게 될지 궁금해서 스팀기가 필요한 주문을 잠깐 보류하고 있는 중일까. 세상이 조용해졌다. 귀먹은 게 아니라면, 둘만 있는 것처럼 온 세상이 고요했다.
"착각하는 거 같은데, 우리 죽고 못 사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몇 번 어울려 논 게 다야. 시환 씨 성격이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어."
짜증 날 정도로 상상이 잘 됐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시환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곳엔 시환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제치고 사랑하는 연인에게 내미는 손과, 그 손을 맞잡은 사랑스러운 소녀가 있었다. 한 손에 솜사탕을 들고 반짝이는 회전목마 앞을 지나쳤다. 길거리 음식도 나눠먹었고, 그렇게 하루 종일 붙어 있었으면서도 밤새 통화하는 두 남녀가 영화 장면처럼 스쳐갔다.
"시환 씨가 하고 싶은 것들 중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놀이공원? 심장 때문에 못 타요. 맛집 투어? 식단 조절 때문에 안 돼. 밤새 연락하는 것도 약 먹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힘들어. 그걸 시환 씨한테 어떻게 포기하라고 해요. 나만 아니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것들인데."
"다른 사람이랑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으니까. 포기가 아니에요."
막무가내였다. 이제 막 덧셈을 배운 애를 앉혀다 놓고 방정식을 가르치는 꼴이었다. 근데도 나는 계속해서 시환을 상대했다.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려도 되는데, 수업을 못 따라가겠다고 교무실로 찾아와 질문 공세를 퍼부어대는 학생을 대하듯이 다시 차근차근 설명했다.
"나 물도 못 들어요. 아니, 휴대폰도 들고 있으면 팔이 저려서 다 떨어뜨려. 조금만 숨찬 짓 해도 잘못될 수도 있고, 신경계는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증상이 발현될지 아무도 몰라요. 이런 사람을 굳이 왜 만나겠다고 고집 피우는 거예요?"
"고작 그게 다니까. 그거 말곤 없잖아요."
"고작?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걸 고작이라고 표현해요? 처음으로 마음 열었던 사람을 내쳐야 하는 내 생각은 안 해요?"
감정이 격양돼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 역시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해본 적 없으면서 그가 내 문제를 가볍게 여긴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냉정함을 잃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 남는 건 악밖에 없었다. 그치만,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를, 이조차도 받아들인 나를 자꾸만 살고 싶게 하니까, 헛된 희망 품게 만드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해야 했다. 내게, 그리고 네게.
"송이 씨가 힘든데 왜 나를 내쳐요. 여기서 가버리면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요. 나랑 있으면 몸은 아파도 마음은 안 아플 거야. 어떡할래요, 이래도 갈 거예요?"
그러나, 반대로 시환은 나를 타일렀다. 억울해하면서, 또 속상해하면서, 내가 내린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으려고 목소리로 나를 어루만졌다. 힘이 축 빠졌다. 마지막으로 발악해 보는 거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땐 내 잘못이 아닌 거다. 몇 번이고 경고했고, 시환이 주장한 대로 그에게 모든 선택권을 넘겼다. 이랬는데도 그가 내 손을 잡아버리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