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검사 결과는 INTJ, 인간관계에서의 스타일은 회피형. 불안과 우울에 상처 받기 쉬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타인에게는 무감정적으로 보이는 유형. 타인과 가까워졌을 때 그로 인해 상처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감정적인 거리감을 불어넣는 타입. 시환의 MBTI는 ENFP, 인간관계에서의 스타일은 에너지형. 감정이 얼굴에 잘 드러나고, 분위기를 잘 이끄는 유형. 인싸 중의 아싸, 아싸 중의 인싸 타입. 재회한 기념으로 하루 종일 붙어있겠다며 집까지 쫓아온 시환이 인터넷에 떠도는 테스트를 해본 결과, 나와 그는 천생연분이란다.
"봐요, INTJ를 포용하는 ENFP. 아주 찰떡궁합이라니까?"
진짜 정신과 전문의에 의한 결과도 아니고, 몇 문항 안 되는 거 잠깐 시간 들여서 한 게 다임에도 시환은 완전히 빠져 있었다. 누가 보면 집주인인 줄 알 정도로 편안히 식탁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눈은 아까 하도 울어서 퉁퉁 부어 있었다.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내, 물에 살짝 씻어내곤 시환에게 줬다.
"보통은 사과 주지 않아요? 화해 의미로다가?"
"..... 눈 부었어요. 그리고, 난 사과할 거 없는데."
미안한 거 투성이었지만, 퉁명스러워졌다. 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이 왜들 그렇게 통통 튀어 다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말로 표현하긴 어렵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내가 잘못해도 너는 이해해 줄 거라는, 기대 혹은 믿음이 바탕에 깔린 그런 감정이었다. 이런 나를 귀엽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받아주는 시환 덕분에 가까스로 이해하게 된 감수성. 어른들이 사랑을 해야 성장한다고 떠들어대는 말을 어렴풋이 수용했다.
"이쪽으로 와 봐요."
못 이기는 척 어물쩍하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시환은 나를 의자에 앉히고 자리를 바꿔 맞은편에 섰다. 의자가 하나뿐인 식탁이라 둘 중 하나는 서 있어야 했기에, 배려해준 거다.
"우린 생각도 비슷하고, 어딘가 묘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어. 처음부터 딱 맞는 커플은 없으니까, 이만하면 괜찮은 시작이에요. 송이 씨는 내 이상형이고, 정말 좋아하는 여자니까 내가 양보할 거예요. 그래야 내가 행복해. 송이 씨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라서 우리가 조금 어긋나면 내가 사과할 거예요. 잃고 싶지 않으니까. 대신에, 송이 씨가 해줘야 할 일은, 나한테 숨기는 게 없었으면 해. 눈빛만 보고 서로를 알려면, 마음에 대한 대화가 많이 오고 가야 하거든요. 그거면 송이 씨가 두려워했던 일들, 안 일어날 거예요. 느려도 괜찮으니까. 알았죠?"
내 손을 잡는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마음까지도 따뜻해졌다. 이 여름에 뭐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다행히 에어컨을 틀어놔서, 좋았다. 그리고, 시환이 부탁한 대로 바로 실천하기로 했다. 이왕 시작한 거, 늘 불안하고 미안하고 또 고맙겠지만,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숨기지 말랬으니까, 숨기지 않고 얘기할게요."
"네! 뭔데요?"
"시환 씨가 잡고 있는 손, 아픈 손이에요."
시환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굶주린 여우의 인기척을 느낀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며 행동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을 본 적 있다면, 시환이 꼭 그랬다. 이 사람, 아무래도 나보다 어릴지도 모르겠다.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미칠 노릇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돼요?"
"이제 그런 말 안 하고 불쑥불쑥 집착해도 돼요. 나 그런 거 좋아해."
못 말린다. 아무래도 내가 끌려다닐 것 같은 기분이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세상을 홀로 헤쳐나가야 했던 험난한 첫째로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앞에 든든히 있어 준다면야 감사할 일이었다.
"몇 살이에요?"
풉.
시환이 결국 터트렸다. 그것도 아주 활짝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시원한 웃음을 눈물까지 보여가며 토해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나이를 묻는 게 웃긴 일인가? 의아했지만, 그의 호탕함에 내 안면 근육도 씰룩였다.
"후아. 송이 씨 귀여워서 어떡하지."
팔꿈치를 식탁에 대고, 이번에는 양 손으로 내 오른손을 포개었다. 영문 모를 낯 뜨거운 애정표현에 뺨이 절로 붉어졌다. 나는 생각만 하는데, 이 사람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 다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지 신기했다.
"인터넷에 그런 거 있어요. 연인 문답 백선 이런 거. 그거 해요, 우리."
거실을 한 번 둘러보더니,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내 손가락을 지문 인식기에 대고 쉽게 컴퓨터를 켰다. 자연스러운 걸 보아하니 꽤 경험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이 모든 게 다 처음인데, 시환 씨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복잡 미묘해졌다. 근데 뭐, 이런 매력적인 사람이 나처럼 혼자였을 리는 당연히 없겠지 싶어 한숨으로 심경을 다잡았다.
"자, 이걸로 하나씩 알아가 봅시다. 첫 번째, 잠이 안 올 때 하는 행동은?"
이름, 생년월일, 특기, 취미 등 자기소개서에 쓸 법한 단순한 기초 질문부터 좋아하는 장소, 설레는 스킨십, 싫어하는 행동 등 연인이 알아두면 좋을 팁도 여럿 있었다. 백 개 정도 되는 문답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재미있었지만, 체력적으로는 지쳐서 나는 침대에 눕고, 그는 바닥에 앉아 누운 나를 쳐다보며 마지막 질문까지 끝마쳤다.
"나에게 연인이란? 그리고 그 연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음, 이건 내가 먼저 할래요."
둘 다 잠에 취해서 말이 느려지고, 나긋했다. 옆으로 돌아 누운 나와 이불에 턱을 받치고 눈을 지그시 감은 시환은 서로의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한테 송이 씨는 전부예요. 그리고 음... 내 손 잡아줘서 고마워요. 좋아하는 만큼 꽉 붙잡을 건데, 아프면 말해요. 또 너무 느슨해져도 말하고. 그렇게 내가 송이 씨한테 맞출 수 있게, 놓지만 말아요."
잠꼬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띄엄띄엄 끊어지는 말이었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에 꽂혀 심장에까지 안전히 전달됐다. 시환은 그대로 고른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저린 팔에서 통증을 못 느꼈다. 새벽 한 시. 아파서 깰 시간이었는데, 아프지 않아서 깨다니.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만, 어쩌면 나에겐 병원 치료보다, 시환이 필요했던 거 같다. 마무리 짓지 못한 문답 최종 질문을 곰곰이 떠올렸다. 잠든 시환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깨어나면 하지 못할 깊은 진심을 나지막이 읊었다.
"저는 아직, 혼자 생각하고 되뇌는 게 익숙해요. 마인드맵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입으로 내려가야 할 말들까지 막아버려서 답답하지만 그냥 우는 걸로 대신해. 그러니까 느릴 거예요. 시환 씨가 힘들지도 몰라. 그래도 겁이 나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면 좋겠어요. 노력할게요. 나는 시환 씨가 좋으니까, 사라지지 말아요. 시환 씨가 흘러들어왔으니까, 스펀지처럼 다 흡수해 버릴 거야. 알았죠?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마신 물 같은 존재가 됐으니까, 1퍼센트도 사라지지 말아요."
밤이 깊어갔다.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덧 얇은 외투가 필요한 가을이 돌아왔다. 한낮 뜨거운 태양에 낙엽이 하나 둘 빨갛고 노랗게 익었다. 내 혈색도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강사 일을 그만둬야 할 정도로 치료가 시급해졌다. 대신 글을 썼다. 지금도 글 때문에 잠깐 나왔다가 학원을 지나쳤다. 정쌤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다른 어학원으로 이직해 여유로운 삶을 보내는 중이고, 김쌤은 소개팅에 실패할 때마다 연락해 은형 오빠를 소개해달라고 난리다. 김쌤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날 이후 피해 다니던 오빠를 만나러 병원을 찾았다.
"오빠. 안녕."
오빠는 내 눈을 피했다. 1년 전과 같은 반김을 기대한 건 당연히 아니지만, 찬 바람 쌩쌩 부는 공기의 흐름에 입술을 오므렸다. 인턴 의사들이 뒤에 쭉 서서 진료 과정을 직접 보고 배우는 중이었다. 다른 환자들에게도 쌀쌀맞게 대했으면, 지켜보는 내내 긴장 상태겠다 싶어 괜히 안쓰러웠다. 내가 그들을 힐끔 쳐다보니, 은형 오빠가 후배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여태 한 번 없었던 광경에 놀랐을까 배려하는 듯했다. 자길 두고 간 사람에게도 변함없이 좋은 오빠였다.
"몸은 좀 어때. 서 선생님한테 듣기론, 운동 열심히 하고 있다는데."
괜히 딸깍이는 볼펜, 초점을 잃은 동공이 향한 모니터, 떨리는 음성. 은형 오빠는 지금 무섭도록 잔인한 나의 등장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응. 일 그만두니까 시간이 여유로운 거 있지."
"팔 못 쓰면 심장이 무슨 소용이냐더니, 정신 차렸네."
여전히 손이 말을 안 들어 타자기 하나 치지 못할 때가 되면, 우울함과 상실감에 빠져든다. 시환이 물 뚜껑 따놓는 것을 깜빡하면, 카페까지 나가 음료수로 목을 축여야 하는 상황엔 기가 막힌다. 그래도 이젠 방법을 찾으려고 애쓸 줄 안다. 타자가 안 되면 멀쩡한 오른손으로 펜을 집고, 물은 그냥 정수기를 들여놨다.
"오빤 잘 지냈어?"
심장 치료가 우선이라 은형 오빠를 만난 건 대략 두 달 만이었다. 의사끼리 의학적 소견을 주고받는 일은 있었겠지만, 따로 연락은 없었다. 나에 대한 배려였을 거다.
"최종 결과에서 혈압이나 맥박이 정상 수준에 들어오면, 수술 날짜 잡을게. 오늘은 약 처방만 받고 가 봐."
친절했지만 다정하진 않았다. 어떻게 대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는데, 오빠가 알아서 벽을 쌓아준 덕에 쉽게 물러날 수 있었다. 마음이 온전히 편한 것과는 별개였으나, 아직 마주할 정도로 단단히 마음이 굳은 상태가 아니라는 언질을 준 게 고마웠다. 내가 할 일은, 다시 친한 은형 오빠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응이라는 짧은 대답과 함께 일어났다. 오빠가 앞서가 문을 열어줬다.
"미안해, 오빠."
발을 떼기 전에 사과했다. 오빠가 하- 하고 짧은 탄식을 뱉어냈다. 이기적인 행동이었지만, 사과 없이 돌아가면 내가 잊지 못할 거 같아서 어쩔 수 없었다. 시환을 만나면서 내 감정도 소중하다는 걸 배웠다. 그래서, 오빠보다, 나를 조금 더 생각해서, 미안하지만, 미안한 일을 또 저질렀다.
"... 유시환, 그 사람이랑 지내는 거니?"
"응."
"오래 못 갔으면 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다시 통 하고 뛰어올랐다.
"너한테 내가 얼마나 좋은 남자인지 깨닫고 찾아오길 기다릴게. 그 사람, 하나부터 열까지 나랑 다 다른 거 같으니까, 떼어놓기 어렵지 않을 거야."
저주를 퍼붓는가 싶더니, 차마 정리하지 못한 관계의 파편을 천천히 끌어모아 원래 있던 곳에 붙이려는 오빠의 진심이 가감 없이 전해져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 바쁜 걸음으로 병원을 휘젓고 다니는 간호사, 오랜만에 방문한 가족과 산책 가는 어르신, 통증도 잊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어린 친구들. 작은 소음조차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우리는 문을 닫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배경 속에 묻히길 바라는 사람들처럼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다음 진료 때는, 시환 씨도 같이 올게. 같이 밥 먹자."
고개를 저으며 웃는 오빠에게 실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오빠가 문을 닫을 수 있도록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동안 나를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까지 긴장의 끈은 팽팽했다. 그리고, 탁. 마음이 한 결 편안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환에게로 향했다.
가까스로 1층에 다다랐을 때, 동료의 부름 대신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시환의 이름을 불렀다.
"시환 씨!"
뜻도, 부르기도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은 해왔지만,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운 두 음절이었던가. 웃음이 마를 날이 없어 문제다. 근무 시간엔 딱딱하게 굳은 안면 근육들이 오후만 되면 들썩이는 광대로 고생 중이었다. 매일 매 순간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는 시간마저도 아까웠다.
"바로 집으로 갈 건데 왜 왔어요, 피곤할 텐데."
"보여주고 싶은 거 있어서요. 짠!"
클리어 파일에 있는 하얀 종이엔 전자책 출판 계약서가 떡하니 끼워져 있었다. 시환은 제 일인 마냥 하얀 이를 드러내며 진심으로 축하했다.
"봐요, 내가 뭐랬어. 송이 씨 작가로서 능력 있다고 했죠?"
아직 갈 길이 멀다. 훨씬 다양한 경험과 깊은 지식을 뽐내는 전문가들도 글을 쓰는 시대에 뛰어난 사람들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빠져드는 문체를 화려하게 소화해내는 재능 있는 업계 사람도 많을 테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갈고닦아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도 곳곳에 숨어 있다. 하지만, 시환은 한 사람의 글이 좋았다. 잔잔하고, 고요하고, 하지만 그 속에 느껴지는 뜨거운 사랑이 내면을 그대로 반영되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심장을 일렁였다.
"시환 씨 만나고부터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거 같아. 고마워요. 오늘은 내가 쏠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시환은 비록 위험한 찻길이 바로 옆인 왼편에 설 수는 없지만, 예쁜 말을 적어 내려 가는 귀한 오른손을 잡을 수 있어 행복했다. 저녁으로 뭘 먹든 행복의 포만감을 이길 음식은 없을 거다.
"다 먹고 카페 가요. 나는 커피 마시고, 송이 씨는 물 마시고."
"에? 왜 난 물이에요?"
"물 좋아하잖아요. 내가 커피 마시자고 했을 때 물 들고 가버렸던 거 잊은 거야, 1년밖에 안 된 일을?"
좋다. 티격태격하며 이 사람 곁에 남을 수 있다는 게 미치도록 기쁘다. 맞잡은 두 손을 절대 놓치 않으리라. 잘못된 방향으로 간다면 붙잡고, 붙잡혀 평생을 나란히 걸으리라.
내가 당신으로 인해 살고 있듯, 당신이 나로 인해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오늘을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