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 가볍게 가고 마음은 꽉 채워 돌아오기
처음에 미국에서 캠핑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은 나였다.
일단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차에 한 가득 짐을 싣고, 풀고, 싸고, 다시 싣고, 다시 풀고 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그야말로 질색하는 스타일이다. 집에 형광등 하나 갈아 끼워본 적 없어서 일흔이 넘으신 친정아버지가 항상 만능 해결사 역할을 해 주시고, 심지어 남편은 어린이용 놀이 텐트 조차 조립하기 싫어한다. 결혼 전엔 모든 남자가 레고에 환장하고 라디오 몇 개쯤은 분해해서 박살 내는 줄 알았다. 나의 이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려 준 남편은 어렸을 때도 그 흔한 건담 프라모델 하나 조립해 본 적이 없단다.
영 내켜하지 않는 남편을 등 떠밀어 간 곳은 REI(Recreational Equipment Inc.). 캠핑부터 스포츠 용품까지 야외 활동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고 있는 아웃도어 전문용품점이다.
그곳에 텐트를 구입하러 가서 우리의 요구사항은 단 하나, 설치가 가장 쉽고 빠른 것. 남편은 바닥에 탁 던지면 1초 만에 펼쳐지고 돌돌 말면 끝나는 텐트를 원했다. 나는 한강 시민공원에서 햇빛 가리개용으로 펼치고 낮잠 잘 것이 아니고, 아이와 함께 비바람과 야생동물을 피하며 국립공원에서 잘 텐트이니 좀 더 안전한 것을 원했다. 다행히도 1초 만에 펼쳐지는 마법 텐트 같은 건 REI에서 취급하지 않아서 남편과 불필요한 신경전을 피할 수 있었다. 가격은 조금 더 비쌌지만 5-10분이면 충분히 설치할 수 있다는 4인용 텐트를 500불에 구입했다.
랜턴은 캠핑을 자주 한다는 점원이 직접 써 보고 강력 추천한 제품으로, 버너는 한국에서도 흔한 콜맨의 2구 버너를 수월하게 선택했는데, 가격이 천차만별인 침낭 선택에서 시간이 걸렸다. 보온성에 따라 가격차가 2배 이상 되었다. 우린 영하 10도의 날씨에도 무리 없는 침낭을 마침 세일가로 개 당 120불에 구매했다.
그렇게 해서 총 구매 금액이 맞춘 듯이 정확하게 1000불에서 몇 달러 빠졌다. 한국에서 사계절용 텐트 가격이 수백만원인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미국에서는 우리가 구매한 금액의 텐트와 침낭도 꽤 비싼 축에 속했다. 코스트코나 월마트 등에서 100-200불대의 텐트를 사서 쓰는 사람이 흔하다.
미국은 무엇이든 구매도 쉽고 반품도 구매만큼이나 쉽다는 점을 악용해 동부의 코스트코에서 캠핑용품을 사서 미국 횡단을 한 후 고이 접어 서부의 코스트코에서 반품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에이~설마 그렇게 쓰던 걸 바꿔 주겠어.” 했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도 쓰던 텐트를 반품하게 되었다. 4인용 텐트로 그랜드캐년에서 첫 번째 캠핑을 하니 다소 좁게 느껴졌다. 혹시나 하며 REI에 다시 가지고 갔다.
괜히 쓸데없는 용품들을 둘러보는 척 빙글빙글 돌다가 마침내
“사갔던 텐트가 편하긴 한데 좀 작은 듯……” 웅얼거리자
“편하셨다니 기쁘네요. 작게 느끼셨다면 6인용으로 교환하세요!!” 말하는 게 아닌가.
이럴 수가! 흙이 얼룩덜룩 묻어있는 텐트를! 혹시 반품된 다른 중고제품으로 교환해주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고 있으니 새 제품을 꺼내어 시원하게 척 건네준다.
“이것도 작으면 다시 오세요. 8인용도 있으니까요~!” 방긋 웃으며.
SUV도 아닌 일반 승용차 트렁크에 텐트, 침낭, 아이스박스, 버너, 랜턴, 접이식 의자, 집에서 사용하던 그을린 프라이팬, 쇠젓가락과 수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렇게만 싣고 겁도 없이 우리의 캠핑은 시작되었다.
그렇게 간소하게 간 이유는 뭘 몰라서이기도 했고, 이삿짐 같이 많은 짐을 싣고 갔다가는 남편이 다시는 캠핑을 가지 않겠다고 할까 지레 겁을 집어 먹어서이기도 했다.
이 얼마 안 되는 짐조차 몇 차례의 캠핑으로 노하우가 쌓이자 더욱 간소해졌다.
바람막이 있는 2구 버너는 한국 식당에서 찌개 먹을 때 사용하는 폼 안 나는 휴대용 버너와 부탄가스로 대체했고, 큰 아이스박스도 빼고 부피가 작은 천으로 된 아이스백만 챙겼다. 나중에는 버너 사용할 일이 없어져 그것마저 뺐다. 그 이유는 아주 혁신적인 방법을 찾았기 때문.
처음에는 물을 끓여 한국 마트에서 사 간 즉석밥을 익혀 먹었다. 하지만 2천 미터 넘는 고지대에서 물을 끓이는데도 한참, 밥을 익히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작은 냄비에 즉석밥 세 개 덥히자고 몇 통씩 싣고 가는 가스통과 물 또한 짐이었다. 그런데 다니다 보니 어디든 작은 편의점 하나는 반드시 있었고, 아주 작은 마트라도 냉동식품 조리를 위한 전자레인지가 반드시 있었다. 30분씩 걸리던 즉석밥 익히는 일이 전자레인지를 이용하니 2분 만에 끝. 유레카! 처음에는 살짝 점원의 눈치를 봐가며 전자레인지를 이용했지만 나중에는 아침에 추운 몸을 녹여줄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사면서 자연스럽게 이용했다. 점원들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뜨거운 물도 마음껏 쓰란다. 다음 여행에는 즉석밥에 더하여 컵라면까지 가져가서 뜨끈한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평상시 보다도 캠핑 갈 때 오히려 밥과 밑반찬을 잘 챙겨갔다. 일주일 여행 동안 한 가족이 삼시 세 끼를 사 먹는 것을 계산하면 그 비용도 적지 않다. 7일*3끼*4명=무려 84인분이다. 사 먹는 메뉴라봐야 대개 샌드위치, 피자, 샐러드류인데 종횡무진 여행지를 누비고 다니기에는 든든하지가 않다. 결국 여러 종류 음식을 마구 시켜 무리하게 칼로리를 섭취하고도 허전한 느낌이 들어 하얀 쌀밥 생각이 간절해지는 경험을 몇 번 한 후 하루 한두 끼는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 다녔다.
'넓은 것은 오지랖, 깊은 것은 정, 많은 것은 흥 뿐이고
좁은 것은 세상, 얇은 것은 지갑, 적은 것은 겁 뿐인 가족'
<'겁 없이 살아 본 미국' 책은>
평범한 40대 회사원 남자가 미국 경영전문대학원(MBA) 입학부터 졸업하기까지,
10년 차 워킹맘이 직장을 그만두고 떠나 무료영어강좌에서 수십 개 나라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고,
알파벳도 구분하지 못하던 큰 딸이 2년 만에 해리포터 시리즈를 완독하고,
Yes/No도 모르던 작은 딸의 미국 유치원 적응기까지, 다양한 미국의 교육 현장 이야기와
전화도 터지지 않는 서부 국립공원 열 곳에서 한 달 이상의 텐트 캠핑,
현지인들과의 소중한 인연,
경험이 없는 덕분에 좌충우돌 해 볼 수 있었던 경험을 생생하게 담은 책.
출간 두 달 만에 2쇄 인쇄. 브런치 글 100만 뷰.
페이스북 팔로워 1400명(www.facebook.com/MKLivingUSA)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리워지는 장소와 사람과 음식이 생겼고
나이와 국적에 대해 견고하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면서
친구 삼을 수 있는 사람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고,
서로 다른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하며 다름을 인정하게 되었고
낯선 곳에 뚝 떨어져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당황해서 주저 앉아 울고만 있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것이 결국은 '성숙해진다'는 것이 아닐까.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