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겐 그냥 예의상 한 번 물어본 것이고, 이미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정해져 있었다. 답정너.
그리하여 1초 만에 목적지는 푸껫으로 결정. 이제 계획을 짜야하는데, 유럽 신혼여행을 만회하고자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름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일정도 염탐할 겸 여행사 홈페이지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합리적인 가격대의 패키지 상품을 발견했다. 3개월 만에 떠나는 두 번째 신혼여행.
그래, 이번엔 모든 걸 맡겨보자. 남편도 좋아할 거야.
언니, 여긴 완전 꽁꽁 한파야. 때 잘 맞춰서 휴가 잘 떠났다.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
푸껫에 도착하자마자 바뀐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사촌 동생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몇십 년 만의 기록적인 한파로 겨울왕국이 되었다는 뉴스 기사를 보았지만, 여행 내내 온몸에 착 붙어 있던 푸껫의 습기로 인해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캬, 한파 속의 여름휴가라니. 높은 습도 따위쯤이야. 푸껫 여행을 위해 준비해 둔 공작새 원피스를 입고 예쁜 사진을 찍을 생각에 그저 신나 있었을 뿐.
머리에 꽃 핀 까지 꽂았으니 이제 두 번째 신혼여행을 즐겨볼까?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는, 공작새 원피스
여행사 대형 버스 안.
목청이 터져라 열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시는 가이드님을 외면할 수 없어 졸고 있던 남편 몫까지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나로서는 가이드님에 대한 최선의 예의를 표시한 셈.
섬 투어를 포함하여 중장거리 일정으로 아침 7시 반에 집합해야 했던 탓에 남편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버스를 기다리던 호텔 로비에서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슬쩍 옆구리를 쿡쿡 찔러봤지만 소용없었다.
왠지 느낌이 왔다. 이번에도 수학여행 각이구나.
여기는 제임스 본드 섬.
영화 007 시리즈 촬영 장소라는 생각에 들떠있던 나와는 달리, 보트를 타고 섬까지 들어가는 내내 남편은 뱃멀미로 ‘욱욱’ 거리며 두통을 호소했다.
'왜 이러니 정말. 나는 무슨 강철 체력도 아니고, 또 괜히 내가 민망해지잖니, 자기야?'
겨우 인증샷 몇 장을 건지고 힘겹게 섬투어를 따라다녔다. 이후로도 버스에 오르고 내리기를 수 차례.
버스만 타면 꿈나라로 가는 남편을 바라보다 이틀이지나갔고 어느새강도 높은 패키지 투어의일정도 끝이 났다.
저녁이 다 되어 호텔로 돌아와,
“자기야, 선물이 있어, 내일 하루는 완전 자유일정이야.”
패키지 3박 4일 중 마지막 날 하루는 온전히 자유일정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아침부터 매우 빡빡하게 일정을 짰을 나지만 아무 계획도, 그 어느 것 하나 정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남편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오늘 하루는 자기 마음대로 해. 난 무조건 오케이야.”
막상 남편 마음대로 하라고는 했지만 오전 내내 늦잠을 자는 모습에 살짝 울화가 치밀 뻔했는데, 팟타이가 살렸다. 운 좋게 대기 없이 먹었던 현지 맛집의 팟타이가 화를 가라앉혔고, 느지막이 나와서 남편과 손잡고 빠통비치를 걸으며 평화롭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고마워, 팟타이. 다 네 덕분이야.
빠통비치의 석양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자기야, 공작새 원피스 뽕 뽑아야 하니까 해 지기 전에 비치 배경으로 사진 좀 찍어줘. 어서.”
또다시 여행사 버스 안.
돌아가는 비행기 탑승을 위해공항으로 가던 조용한 버스 안에서 남편의 휴대폰이 성난 듯 계속 울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