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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라 Nov 24. 2024

싸우다 판난 삼 남매 여행기 1 (일본 편)

일본 고모의 추억

"우리 셋은 다시는 같이 여행 오지 말자."

   

“누나랑 형은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해?”

“누나, 일정이 너무 빡빡해. 그리고 너는 형이 하라는 대로 해.

이것들이 진짜.”

일본 여행 중, 우리 셋이 도쿄 한복판에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왜 그렇게도 싸웠는지, 자세한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치열하게 싸웠다는 것 밖엔.

아, 막내 동생이 예산에서 벗어난 금액의 아이스크림을 먹겠다고 해서 싸웠던 것과 식당에서 메뉴 고르다 다투는 바람에 밥을 못 먹을 뻔했던 기억은 분명히 난다.

“누나랑 형은 내가 막내라고 나만 무시하고, 마음대로 결정하고. 나 안 먹어.”

“먹지 마라. 아이스크림 값 하나 굳혔다. 나이스.”

“돈가스랑 우동이랑 이것도 하나 시키자. 저것도 하나 추가. ”

“됐어. 이제 그만. 공동경비 얼마 안 남았어.”

지금 생각하면 이십 대 초중반 성인 셋이서 이렇게 싸웠다는 유치 찬란함에 그저 너털웃음만 나올 뿐.

형제, 자매들끼리 여행 가면 이 정도 싸우는 건 다들 기본 아닌가?          

그렇지만 해도 너무 다. 이렇게 싸우려고 여행 온 것이 아닌데.



일본 고모. 이름만 불러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이름.

일본에 사셨던 둘째 고모는 우리 삼 남매를 지극 정성으로 아끼셨다. 어렸을 적부터 옷이며 온갖 아기용품은 물론이요, 손수건 한 장까지 정성스레 소포로 부쳐주셨다. 그뿐인가. 학창 시절 워너비였던 SONY 카세트, 일명 마이마이부터 전동 연필 깎기를 비롯한 다양한 학용품, 옷, 간식 등 주기적으로 보내주시던 소포 꾸러미에 우린 정말 행복해했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지금이야 흔하지만 30여 년 전, 고모가 보내주신 고체 카레를 얼마나 맛있게 먹었던지 밥 두 그릇은 뚝딱이었고 흔들 샤프는 학교에 가져가면 친구들이  한 번씩 다 흔들어대느라 쉴 틈이 없었. 일 년에 한 번, 고모께서 한국에 오시는 날이면 거의 축제 분위기. 고모의 가방엔 뭐가 들어있을지 상상만 해도 설레고 기뻤던 시절이었는데, 이젠 더 이상 고모 품에 안길 수가 없다.


고모는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신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너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급하게 아빠만 일본으로 건너가 고모 장례식에 참석하실 수 있었다. 고모는 아빠가 병원에 도착해 얼굴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1남 3녀 중, 막내 고모와도 10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막내아들인 우리 아빠는 그 당시 온갖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그 시절, 늦둥이 막내아들이라면 어땠을지 안 봐도 비디오.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 노래를 유난히도 좋아하셨던 고모. 아빠는 지금도 둘째 누이가 생각나, 이 노래를 못 듣겠다고 하신다. 아빠를 참 아끼셨던 만큼 우리에게도 그렇게 각별하셨던가 보다. 그런데 고모 만나러 와서 이렇게 싸우기 있기, 없기?

그렇다. 우리 여행의 진짜 목적은 일본 고모를 뵈러 납골당에 오기 위해서였다.   



  

여행 내내 신나게 투닥거리다가 마지막 일정인 고모 납골당에 가기 위해 고종 사촌오빠를 만났다. 도쿄 근교의 납골당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도 오랜만에 만난 사촌 오빠에게 얘는 이래서 말 안 듣고, 쟤는 저래서 말 안 듣는다며 큰 누나의 고충을 털어놓기에 바빴다. 당시에는  MBTI를 몰랐기 때문에 내 말에 적극적으로 공감해 주지 않고 은근히 남동생들 편드는 사촌오빠가 괜히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 오빠도 PT 형 인간인가 보다. JF 형인 내가 참아야지 뭐.     


고모의 사진과 납골함을 보는 순간,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흑흑’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고모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알기에. ‘내 새끼들, 내 강아지들’ 하고 부르시던 고모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고, 보내주신 소포를 열면 항상 은은하게 풍기던 고모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일본 여행 중 우리 삼 남매의 마음이 처음으로 하나 된 순간이었다. 나도 우리 고모 같은 누나가 되어야 할 텐데.

‘여행 내내 누나가 너무 권위적으로만 행동해서 미안해.’

동생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사과를 마음속으로 혼자 했던 것 같다.



도쿄를 떠나기 전, 마지막 만찬을 위해 유명하다는 초밥 음식점에 갔다.

"공동경비 신경 쓰지 말고 누나가 한 턱 쏠 테니 마음껏 먹어."

"오, 먹을 초밥 종류와 개수까지 정하고 온 거 아니었어?"

"조용히 하고 먹기나 해라."

푸짐하게 후식까지 먹고 번잡한 시내 한복판을 기분 좋게 걷는 동생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일본 고모도 조카들을 보는 마음이 이러셨을까.

고모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사진을 보니, 옛 추억의 아련함이 몰려옴과 동시에 고모가 너무나도 보고 싶은 밤이다.

그때도, 지금도, 고모가 사무치게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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