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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Jul 25. 2018

직업이 주는 정체성

딱 올해까지만 하고 관둘 생각을 하는 직장인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직업은 이름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정체성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이름, 출신, 가치관보다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사람을  판단한다.


일반인 연애 프로그램에서도 입소 첫날 얼굴과 이름은 공개하지만 직업은 다음 날까지 숨긴다. 사람을 한눈에 판단할 수 있는 가장 큰 척도인 직업을 모른 채 그 사람의 됨됨이와 성격만으로 판단하라는 의도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사람의 직업을 알게 된 순간 그를 보는 시선이 확 달라지고, 첫날 0표였던 사람이 직업 공개 후 몰표를 받기도 한다.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직업이 주는 편견과 선입견은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큰 영향을 미친다.


돈이 최고 권력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제 직업은 금수저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딱히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도 자기를 소개하고 내세울 타이틀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다양한 걸 시도한다. 일이나 사업에 애착이 있어서라기 보다 “XX회사 대표이사”나 적어도 "사장님"이라는 직함을 위해 계속해서 사업을 시도하는 금수저들도 많다. 직업이 주는 정체성은 부와 재산이 주는 자존감 이상으로 강력하다.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학교를 나왔고 두 나라에서 모두 직장생활을 했다. 마지막 회사에서 퇴사한 후 학교를 다니며 1년 넘게 일을 쉬고 있는 사이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불편한 힐을 신고 땀을 뻘뻘 흘리며 쉴 새 없이 맨해튼 거리를 누비던 시절엔 한가롭게 요가복 입고 대낮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세상 여유로워 보인다. 그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 리 만무했지만, 남들 다 일해야 하는 시간에 뉴욕에 여행 와서 한가로이 5번가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센트럴 파크를 하루에도 몇 번씩 가로질러 가며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집을 보여주러 다니다 창밖에 한가롭게 잔디밭에서 햇볕을 쬐며 책 읽는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일을 해야만 먹고사는 내 삶이 초라했다.


우리의 마음은 참 간사하다. 막상 내가 일을 쉬게 되니 처음 한 두 달은 맘 놓고 늘어지게 쉬었는데 노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낮에 정장이 아닌 캐주얼 옷에 운동화를 신고 나가 돌아다니는 내 모습이 한심했다. 얼른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싶어 조바심이 났다.


백화점에 가도 정장에 명품백을 들고 구경할 때는 직원들이 깍듯했는데 청바지에 에코백을 메고 들어가니 아무도 신경을 안 썼다. 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나면 또 그만두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부러워하던 주중 낮에 요가복 입고 세월아 네월아 하는 팔자 좋은 여자가 됐지만 내 마음을 채우는 건 여유가 아니라 불안감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일을 시작했고, 유학시절에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미국에서도 학교 졸업 후 바로 일을 했던지라 이만큼 길게 쉬어본 적이 없었다. 내 일이 나의 자존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미처 알 기회가 없었다. 내 자존감은 온전히 나다움과 나의 가치관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일을 한다는 건 한 인간이자 사회 구성원으로서 내 쓸모를 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역할을 하지 않는 것만큼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건 없다. 직장생활을 하다 출산이나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둔 여자들이 느끼는 우울감도 거기에서 오는 게 아닐까. 평생 일을 하다가 퇴직한 사람이 느끼는 헛헛함도 자존감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집에서 노는 것도 아니고 매일 학교에 나가느라 바쁜데도 직업이 없다는 사실이 늘 마음에 걸렸다.


막상 경험해 보면 일하지 않는 삶도 녹록지 않다. 계속 이 사업 저 사업 시작했다 말아먹는 금수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노는 게 당당하고 떳떳한 어른은 의외로 많지 않다. 직업이 주는 자신감과 정체성이란 건 막상 일할 땐 알 수 없다. 인생이란 누구나 한 번밖에 살아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몸으로 부딪혀서 직접 느껴보고 크게 실패해서 인생의 쓴맛과 교훈을 얻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늘 퇴사를 고려하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꿈꾼다. 지금 퇴사를 꿈꾸고 있다면 지금의 직업이 자신에게 주는 자존감과 정체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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