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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정아 Nov 07. 2019

전화 공포증이 있어서요

문자나 이메일로 주시겠어요?

문자로 소통하는 게 일상이 되어 전화통화가 어색하고 불편한 전화 포비아가 흔해졌다는 기사를 접했다. 나는 이런 일이 있기 한참 전부터 전화 공포증이 생겼다. 전화하는 게 두려워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할 때도 불편함이 있었고, 부동산을 그만두고 구직할 때 전화를 받는 게 주된 업무인 일은 미리부터 걸렀다. 


서서히 공포증을 키웠을 많은 사람들과 달리 나는 뚜렷한 사건들이 있었다. 


미국 호텔인턴쉽의 지원서를 보냈을 땐 대학교 2학년이 막 시작한 즈음이었다. 봄학기까지 끝낸 뒤 휴학하고 미국에 갈 생각으로 모든 서류를 국내 인턴쉽 에이전시를 통해 미국에 보냈다. 에이전시 담당자는 "미국에서 서류 검토하고 3~4주 있다 전화 인터뷰 스케줄을 잡을 거예요."라고 하며 미국에서 연락이 오면 그때 전화로 스케줄을 잡자고 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서류를 다 보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기를 시작했던 그해 2월 말. 아직 밤이 길어 이른 아침에도 깜깜했던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그날 아침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침잠이 많아 모든 수업이 10시 이후에 시작하던 난 아침 일찍 일어날 이유가 없는 팔자 좋은 대학생이었다. 캄캄한 새벽에 깨어있는 사람은 아빠뿐이었다. 아직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있던 시간, 아빠가 별안간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날 흔들어 깨우며 전화기를 줬다. 핸드폰도 아니고 무선전화기였다.


-네가 받아봐야 할 것 같다. 영어야.

-누구야 이 시간에.


시계를 보니 다섯 시 정도 된 시간. 이 시간에 누구야. 억지로 잠에서 깨어 상황판단이 안 되는 채로 전화에 대고 헬로? 하니 수화기 저쪽에서 여자 목소리로 영어가 들려왔다.


어리둥절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 누구냐고 물으니 미국에서 호텔 인턴쉽 지원서류를 받은 담당자란다. 아니 인터뷰 스케줄을 잡은 적이 없는데 새벽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녀는 사무적인 말투로 내 신상을 묻고 내 소개를 하라고 했다. 나는 엄마와 아빠가 지켜보는 앞에서, 깊이 잠든 언니 옆에서 침대에 걸터앉은 채 수화기를 두 손으로 잡고 최선을 다해 말을 이어 나갔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무방비 상태에서 영어로 전화를 받아 진땀이 나는 와중에 그녀가 하는 질문도 잘 들리지 않았다. 너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니? 일할 때 손님의 컴플레인은 어떻게 처리했니? 네가 일하며 가장 큰 교훈을 배우게 된 실수는 뭐였니? 성심성의껏 준비해서 대답해야 할 면접용 질문을 새벽 5시에 자다 깬 상태에서 영어로 받으니 바로바로 좋은 답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그러다 다음 질문은 뭐라고 쏼라쏼라 분명 물음표로 끝나는 말이 질문인 것 같은데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임쏘리?를 무려 열 번 가까이 되물으며 다시 들어도 안 들리니 머리는 멘붕에 빠졌고, 아 이제 인턴쉽이고 뭐고 다 끝이구나 하는 참담하고 절망스러운 심정이 됐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혼란이었다. 


어떻게 통화를 끝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내가 못 알아듣고 계속 되물었던 질문을 끝에 가서는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머릿속을 채웠던 절망적인 감정, 상대편이 몇 번을 계속 말해줘도 못 알아듣는데서 오는 극한의 긴장감,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감정만 뚜렷하게 남았다.


날이 밝자마자 한국의 에이전시에 전화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냐며 한번 확인해보고 연락 준다고 했다. 다음날 연락이 와서 들은 얘기는 전날 통화만큼이나 황당하고 억울한 스토리였다. 한국에서 인턴쉽 지원자들의 서류를 받은 미국 담당자가 서류를 검토하다가 "한번 전화를 해볼까"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던 첫 번째 전화의 주인공이 나였던 것이다. 


안 씨라서, 알파벳 A로 시작되는 성이라 내가 1번 타자였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시차에 대한 인지와 배려 없이 새벽 다섯 시에 휴대폰도 아닌 집 번호로 건 전화를 아빠가 받은 것이다.


나와 십분 정도 통화를 하며 본인이 너무 준비 없이 이른 아침에 전화한 걸 알게 되어(통화 중에 내가 분명 시간을 언급했다. 미안하지만 여기 지금 아침 다섯 시고 내가 자다 깨서 지금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네 질문도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전화를 끊었고 나머지 지원자들에겐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억울하고 황당한 일이 있나


그녀와 유일하게 통화한 나는 그야말로 자다가 영어 전화로 변을 당했다. 억울하고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긍정 에너지와 패기가 넘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다음번 정식 인터뷰를 잘 볼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할 수 있게 이런 일이 생긴 거라며 하늘에 감사하고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 일이 있고 2주 후 미국 측과 정식으로 전화 인터뷰 일정이 잡혔다. 미국 시간으로 오전, 한국시간으로 저녁 10시~새벽 한두 시 사이로 정해졌다. 나는 그때의 통화를 한 후 이런 날이 곧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전화 인터뷰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인터뷰 질문이 어떤 종류이고 얼마나 디테일한 의견을 묻는지 미리 겪어본 유일한 경험자였다. 


며칠에 걸쳐서 지난번 담당자가 물었던 것들을 최대한 기억해서 그 질문들을 토대로 서른 가지 넘는 질문을 뽑았다. 지난번의 놀라고 황당했던 감정을 되새기며 어떤 질문에도 완벽히 준비될 수 있도록 자세한 질문들을 만들었다그리고 각각의 질문에 대해 내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최선의 답을 만들어 적었다. 그 서너 장 짜리 글자가 빼곡한 질문지를 이틀 동안 수시로 읽다 보니 어느새 머릿속에 질문과 대답이 자연스레 기억되어 입으로 답이 줄줄 나갈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전화 인터뷰 당일,


학교 수업에 가는 길에도 예상 인터뷰 질문지를 챙겨갔다. 아침부터 속이 좋지 않았는데 첫 수업을 듣는데 배가 쌀쌀 아파왔다. 특별히 먹은 것도 없는데 왜 배가 아프지? 두 번째 수업에도 가야 하는데 배가 뒤틀리듯 점점 더 아파 도저히 학교에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첫 수업만 간신히 끝내고 집에 가니 엄마는 신경성 복통이라며, 인터뷰 때문에 긴장해서 배가 아픈 거라고 했다.


이십 평생 살며 뭔가를 걱정하거나 긴장해서 배가 아파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고, 뭔가를 잘못 먹어 탈이 났다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도 질문지를 들고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며 연습했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죽도 먹고 따뜻한 차도 마셔봤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탈이 나도 크게 났구나 싶었다.


밤이 오고 기다리던 전화 인터뷰 시간이 됐다. 그녀는 지난번같이 정석적인 면접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동안 연습했던 보람이 있었던 것이, 내가 쓴 것과 똑같은 건 아니어도 비슷한 맥락의 질문들이 나오면 미리 준비했던 답들을 자연스레 말할 수 있었다. 내 인생 가장 철저히 준비한 면접이었다. 한 시간의 긴 통화였다. 한국어로 했어도 긴장됐을 전화 인터뷰였는데 영어여서 더 두려웠을 것이다. 인터뷰는 잘 끝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전화를 끊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 가족들은 무사히 인터뷰를 잘 본 나를 축하해줬고, 나도 홀가분한 기분으로 잠에 들려고 누웠는데 그날 하루 내내 괴롭힌 복통이 문제였다. 아침부터 종일 아팠던 배는 이제 인터뷰가 다 끝났고 긴장이 사라졌는데도 계속 같은 정도로 심하게 아팠다. 

나는 무사히 인터뷰에 통과했다. 나 외에 통과한 두 명은 해외파 출신이었으니 자다 깨서 받았던 전화는 분명 축복이었다고 믿는다.

-엄마 이건 신경성이 아닌 것 같아. 뱃속에 뭔 일이 나도 단단히 났어. 


고등학생이었던 불과 3년 전 심한 복통을 이틀 동안 참다가 가까스로 병원에 가자마자 맹장수술을 했던 나였다. 결국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아픈 배를 쥐고 부모님과 응급실에 갔고, 다양한 검사를 해 본 결과 엄마 말씀대로 신경성 위염으로 인한 복통이 맞았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신체에 가져오는 영향이 이토록 무서운 거란 걸 처음 겪어 본 날이었다. 어른의 긴장과 부담을 처음 느꼈다그 이후에도 살면서 손에 꼽을 만큼 크게 긴장할 일이 생기면 배가 아픈 일이 생겼다.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는 경험을 통해 교육되고 기억된다. 나는 교통사고 이후에 운전이 두려워졌고, 자다가 받은 영어 인터뷰 전화 이후 전화가 주는 느낌이 달라졌다. 예정된 전화통화를 앞둔 긴장으로 끔찍한 복통에 시달린 후 전화가 생활 속에서 가진 무게감이 달라졌다.



그로부터 십 년쯤 후, 


당시 뉴욕에서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전화를 싫어하는 나에게 특히 불편한 직업이었다. 부동산을 시작했던 첫 해에 손님이 잘못된 정보를 듣고 오해해서 나에게 전화로 소리 지른 적이 있다. 무심코 받은 전화 저편에서 남자가 화가 난 목소리로 세상의 안 좋은 말들은 다 모아서 고함을 지르는 걸 들으니 심장이 벌렁거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말로 뺨 맞은 기분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회사 화장실에 가서 울었다.


구구절절 사연은 적을 수 없지만 그분이 큰 착각을 하고 성급하게 실언을 한 상황이었다. 전화를 끊은 직후 본인의 오해를 깨달은 그는 다시 통화를 원했지만 내 쪽에서 거절했고, 기나긴 사과 문자를 보내고 자기 윗사람이 직접 나서 사과했지만 이미 놀란 가슴엔 날카로운 말이 남긴 충격과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전화가 두려운 이유는 얼굴을 보고 대화로 하면 무난히 풀 수 있는 일도 전화로는 왜곡되기 때문이다. 


부동산 업계는 큰 액수의 돈이 오가고, 하루하루 날짜와 일분일초의 시간이 월세고 계약금이다. 많은 돈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예민한 상황에는 아무리 평온한 사람도 감정이 격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매너를 잃지 않고 헤어지기 쉽지 않은 분야라, 이 일을 하며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이 생겼다.


웃으며 좋게 만난 손님들이 계약의 과정에서 극한의 감정에 달해 보여주는 속내와 바닥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전화통화란 대부분 폭탄을 투척하는 역할이던 적이 많았다.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 시간차가 생기는 이메일과 달리 전화로는 실시간으로 저쪽의 안 좋은 소식과 격한 감정을 받아내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점점 전화에 대한 공포가 커졌다. 


부동산 일을 그만두고 마음의 평화를 찾기까지 긴 시간과 여러 번의 여행, 학교를 다니며 전혀 다른 환경에 노출하며 글쓰기라는 새로운 활동에 집중하는 경험이 필요했다. 이제 전화통화란 은행이나 크레디트 카드 회사에 전화할 때, 아파트 관리 사무실이나 병원 예약을 할 때만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도구가 되었지만, 아직도 전화 진동이 울리면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이다. 전화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콜센터에서 일하며 정면 돌파할까도 해봤지만 그건 날 망치는 길인 것 같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운전보다 더 두려운 전화에 대한 공포,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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