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 질문 Q. 살면서 스스로를 가장 크게 변화시킨 변곡점과 같은 만남 3가지를 이야기해보자.
진 says
질문을 받고 생각나는 사람은 딸, 남편, 부모님 그리고 여럿이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은 특히 한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그 이야기만 담아보려고 한다.
| 내 인생의 은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선생님
올해로 신경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지 19년차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가까운 지인들에게 하면 다들 놀라곤 한다. 밝은 사람이라 그런 힘듦이 있는 줄 몰랐다고.
나의 정신과 상담은 고3을 앞둔 겨울방학부터 시작되었다.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성실한 학생이었기에 부모님과 학교의 기대는 컸고, 그에 부응하려고 새벽까지 공부하고, 새벽부터 일어났다. 아프던 날도, 집중력이 흐려지던 날도 나는 책상앞에 앉아 있었다. 압박감이 너무 심했던 탓일까, 그렇게 '강박증'이 시작되었다. (보통 강박증은 10대에 잘 발현된다고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강박증이 있다. 내가 가진 강박증은 스펙트럼이 넓었는데, 라운드 티셔츠를 입으면 누군가가 목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든가, 책상위의 물건들이 수평을 맞춰 나란히 정렬되어 있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낀다든가, 가끔은 당장 손을 씻지 못하는 상황이면 괴로워한다든가, 옆에 마실물이 놓여있지 않으면 급격히 불안해 진다든가... 강박증을 일으키는 트리거도 참 다양했다.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나의 몸은 방어기제를 풀가동시켜 근육을 수축시켰고, 뇌가 조여오는 듯 머리가 아팠다. (이런걸 긴장성 두통이라고 부르더라)
당장 살기위해 잠이라도 자려면 정신과 상담이 필요했고,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서 상담을 시작했다. 처음 상담을 받고 진료실에서 나오던 날 아버지의 표정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딸의 보험이력에 정신과 상담 한줄이 써지는게 싫으셨던 건지 "왜 이렇게 나약하냐"며 탐탁치 않아 하셨던 표정. 그래서 그날 이후부터는 용돈으로 몰래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중에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게됐다. 본인도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사셔서 딸이 같은 행동을 보이는게 속상하셨던거다.)
그때는 강박증 때문에 온전히 하루를 살수가 없었다. 약에 취해 늘 반수면 상태였고, 약기운이 빠지면 입은 옷과 주변에 신경쓰느라 공부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마음속으로 빌었다.
'하느님, 제 수명을 줄여도 좋으니 온전히 하루를 살게 해달라고...'
10년 가까이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상담과 약물을 병행했지만 거의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연애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심리적으로 조금 편안해졌는지 증상이 완화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몇년은 상담을 쉬었다. 그러다 회사에서 처음 팀장을 맡으면서 스트레스가 컸던지 다시 증상이 심해져서 근처 병원을 찾게됐다.
그리고 현재의 선생님을 만나면서 나의 강박증 증상은 99% 치료가 되었다. 내 강박증을 치료할 수 있는 딱맞는 약을 찾았고, 강박증을 다루는 법을 체득하게 됐다. 강박증이 찾아와도 "어 그래 왔어? 있다가 가~"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부정하지 말고, 곁에 두라는 것. 그렇게 연습하다보니 강박증도 내가 시들해졌는지 이제는 거의 찾아오지 않는다. 강박증은 아이가 떼를 쓰는 것과 같아서 받아들이고 내버려두면 자연히 떼쓰기를 그만두는 존재였나보다.
나는 강박증 상담을 통해 강박증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덤으로 조직을 관리하고, 아이를 키우는 방법 역시 깨닫게 됐다. 완벽하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라는 것, 실패에 너그러워지라는 것, 떼를 쓰면 달래려고 하지말고 내버려 두라는 것...
이제는 하루를 온전히 살아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생명의 은인이라 부른다.
아직도 어른들은 정신과 상담이라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본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정신과는 일상의 조력자다. 나다운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 그러니 나처럼 강박증을 겪는 사람이든,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든 시간을 내어 상담을 받아보길 진심으로 권한다.
요즘 참 행복하다. 그리고 어두웠던 긴 터널을 이겨낸 내가 대견하다.
윤 says
글을 쓰다보니 감사한 귀인들과 많은 경험들이 떠오르지만, 어느결에 써내려가고 있는 글에 언급된 만남들은 모두 시절인연이 되어버렸다. 인생의 변곡점에서 좋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선한 영향과 좋은 자극을 준 은인같은 분들이었고, 언제든 찾아뵙고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안부를 묻고 싶지만 의외로 수줍음이 많은 나는 이렇게 떠올리는 것으로도 따스하게 환해지는 기분에 만족한다.
| 신촌 플래시 학원 첫날 - 그림판이 불러온 귀인 양슨생님
광고디자인 전공 대학생 시절. 플래시라는 신박한 애니매이션 프로그램에 흥미를 느끼고, 신촌 컴퓨터 학원을 등록했다. 수업을 기다리다 무심코 그림판을 열어두고 그리고 있었다. 그때 다가온 양선생님은 본인이 운영하고 있는 Feople.com 에서 그림 칼럼을 써보지 않겠냐고 물으셨고, 너무 반가운 제안이라 덥석 응했다. 플래시를 만난 계기로 나는 진로를 틀어 플래시 애니매이션 회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회사에 적응하느라 여유가 없어 자주 연락하거나 만날 수 없었지만 종종 연락을 주실때면 '위니아'기업사보만화 연재를 해보지 않겠냐거나, 네이버에 입사지원을 꼭 해보라고 격려해주셨다. 용기를 내어 지원했던 1번째 도전은 미끄러지고, 훗날을 기약하며 잠시 잊고 나의 커리어에 집중했다. 플래시에 이어 한참 붐이었던 도트아바타 디자인으로 싸이월드 미니룸과 스킨제작을, 꿈꾸던 웹에이전시에서 디자이너 겸 전속 일러스트레이터로 차곡 차곡 경력을 쌓았다. 당시 업게의 실력자가 모여있던 A에이전시 채용분야에는 '일러스트레이터'직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싶다는 진심을 담아 지원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면접연락을 받았다.
| 손수석님
"왜 채용분야에도 없는 일러스트레이션에 지원했어요?"
나의 엉뚱하고 무모한 도전에 흔쾌히 응답해주신 수석님의 질문에 나의 답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수석님의 환한미소와 회의실 풍경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UI디자인을 배우면서, 일러스트레이션 그래픽업무를 담당해보면 어떻겠냐고 이례적인 채용을 제안해주셨다. 그해 일러스트레이터로 참여한 프로젝트가 연달아 상을 받으며 네이버에 한발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서류전형, 1차 실무면접 후 최종 임원면접.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얼어 붙고 말았다. 내 앞에 앉아계신 두분의 임원 중 오른쪽에 양선생님이 앉아계셨다. 너무 오랜만에 면접실에서 서로의 근황을 확인 한 것이다. 나와 양선생님 모두 놀라 두눈만 꿈뻑거렸다. 몇년 만에 뵙는 터라 나의 얼굴은 금새 방가움으로 활짝 피어 올랐다. 처음 만날 적엔 풋풋한 대학원생이었던 양선생님이 본인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전문가로, 멋진 어른으로 성장한 모습을 두눈으로 확인하니 뿌듯하고 기쁜 마음이 들었다. 긴장감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한편으로는 나 또한 그동안의 성실한 노력으로 조우할 수 있어 기뻤다. 양선생님은 형평성을 위해 내게 질문하지 않으셨고, 다른 임원분과 면접을 보았다.
| 2008년 네이버의 입사와 2015년 독일로 떠난 일이 내인생의 가장 큰 변화일 것이다
네이버에 다니면서 나의 생활과 일하는 환경, 나의 경제생활이 안정되고 안목과 취향이 확장되었다. 놀라울만큼 스마트하게 일 잘하는 동료들에게 매일 자극 받고, 안전한 환경에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와 테스트를 무수히 거치며 디테일한 차이까지 적용해 볼 수 있었던 경험은 장인정신과도 닮아있었고, 브랜드가 가진 철학에 긍지와 자긍심을 가지며 일하는 것은 참 멋진 기분이었다. 브랜드 디자인은 사람을 키워 내듯이 오랜시간 정성이 필요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스스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는다. 성장하고 정체하고 고민되는 과정이 마치 한 사람의 성장스토리 같아서 단순히 직업 이상의 의미를 느낀다. 자연스레 사고하는 방식도 생각의 결도 하는 일을 닮아간다. 충분히 생각하고 꾸준히 정성을 다하는 일을 시간에 쫒기며 불안하지 않도록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셋팅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독일에서의 하루 템포는 느린편이다. 기분 좋은 새소리에 눈을 뜨고 커피 한잔을 모카포트에 올리고 창가에 서서 나무를, 하늘을 지그시 바라보며 아침이 주는 설레임에 어떤 하루를 보낼지 생각한다. 나무가 우거진 도심을 걷는 중에 조깅이 아닌 이유로 뛰는 사람은 거의 찾아 볼수 없다. 아주 가끔 나는 시간에 늦어 달리곤 했는데 급히 허둥지둥 달리고 있으면 거리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당황하며 주목받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곳에서는 바쁜 척하는 것이 부끄럽고 민망한 행동으로 느껴져서 조심하기 일쑤였다. 필요할땐 재빠르고 민첩하게 날렵해지는 것을 즐기던 한국의 모습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오고 나면 금새 얼굴이 붉혀졌다.
잘쉬고 잘 즐기고 잘 먹고 잘 웃고 솔직하게 자기의견을 또렷히 말하고 상대의 생각과 의견에 귀를 쫑긋거리며 호기심 어리게 질문하는 그들을 보며. 자기템포대로 자기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사람답고 자연스러운 것인지 깨달았다. 포장지 없이 알맹이를 보여줘야 하는 문화가 나를 더 자주 행복하게 했다. 돈이 없는 것 보다 자기 생각이 없는 것이 가장 큰 가난이고 초라한 일이었다.
이 또한 독일이라는 문화 환경에 놓여서 처음 몸으로 체득한 경험이고,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 중요하거나, 그래서 매일 배우고 자극 받고 질문하고 답하게 되면서 지극히 나만의 필터링으로 느낀 경험이지만, 한국의 장단점과 독일의 장단점이 참으로 달라 더하고 빼면 결국은 0 되는 거라, 어디에 있든 내 구미에 맞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선택지를 고르면 되는 일이다.
내가 지금 있는 곳에 발을 붙이고 유연하게 시의적절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재미있다면 충분할 것 같다.
문 says
| 로쇼쿄와의 만남
원래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남편과는 암묵적으로 딩크에 합의했고 결혼 5년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않아 부모님들도 초반엔 좀 채근하시다가 포기하신 상태였다.
그러다 덜컥, 정말 덜컥 로쇼쿄가 생겼다.
처음엔 참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난 항상 최선을 다해 열심히니까 뱃속의 아기를 위해 최선을 다해 좋아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이랑 다투게 되거나 회사일에 문제가 생겼는데 달려나갈수 없을때 뱃속의 로쇼쿄가 참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진짜 빼박 “아줌마”가 된다는 사실이 참담했다. 아기한테 시간과 여유를 뺏겨 꾸미지도 못하고 요가도 못하고 커리어까지.. 하고싶은거 다하고 살았는데 이젠 그런 자유로운 삶은 끝이구나 싶어서.
그리고 로쇼쿄가 태어나고 8개월,
나는 이 아이 없는 삶을 상상할수가 없다. 예쁜옷 못입어도 좋고 요가 못가도 좋고 육아와 살림과 일을 병행하는 삶이 고되고 힘들어도, 하루하루가 참 행복하고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