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스타트업을 막 시작한 때라 자정이 넘어 들어올때가 많았고, 양가 부모님 모두 지방에 계셔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독박육아가 몇년간 지속됐다. 심지어 첫 100일간은 너무 힘든탓에 모성애가 생기지 않는게 고민이었다.
7살까지 4명의 베이비시터를 거치면서 시터가 바뀔때마다 일을 관둬야하나 라는 고민을 수도없이 해야했고,
그 고민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란 것을 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아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은 "YES"다.
아이가 없는 삶은 걸어보지 않아 그길이 어떤 모습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는 누군가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권유할수는 없다.
하지만 나에게 물어온다면,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나를 더 자라게 하고 훨씬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를 키우게 되면 느낄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지기 때문이다.
| 낮은 곳의 슬픔
아이가 9개월이 되던 무렵, 처음보는 낯선 베이비시터에게 아이를 맡겨두고 일을 나갈때만해도 이제 회사에서 맘편히 커피한잔은 마실수 있겠구나 라는 마음에 설레였다. 베이비시터가 아이와 잘 있겠지라는 자기 최면을 걸면서 회사를 다녔고, 몇달후 아이가 잘 지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느꼈던 미안함과 죄책감은 살면서 느껴본 슬픔의 가장 낮은 곳이었다.
첫베이비시터라 남편과의 상의끝에 거실에 CCTV를 설치했고, 시터 이모님께도 동의를 구했다. CCTV때문인지 아이와 산책한다며 집을 비우시는 경우가 많았고, 하루 9시간을 아이와 단둘이 CCTV가 달린 집에서 시간을 보내시기에 얼마나 갑갑할까 싶어 내버려두었다.
몇달후 업무를 하다 잠깐 시간이 나서 CCTV를 보다가 스피커 기능이 있는걸 보고 이어폰을 꽂아 소리를 들었고, 그 자리에서 내 커리어는 여기서 끝났다고 생각하고 바로 짐을 쌌다. 이어폰 너머로 들린건 CCTV에 등을 돌린 아이는 악을 쓰며 울고 있었고 시터 이모님은 아이에게 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 아이를 맡길때는 그렇게 다정했던 분이.. (이런글을 보고 모든 시터 이모님에게 불신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행히 그분 이후로는 무난한 분들을 만났고, 정말 가족처럼 아이를 편하게 대해주시는 분도 있었다)
그 일 이후로 한달을 내리 울어야했다.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고서 아무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고, 지방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새벽출근을 위해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4시간을 내리 울었다.
다행히 양가 부모님의 도움으로 커리어를 포기하려던 순간은 잘 넘길 수 있었다. (조금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있는 요즘, 그 때 그 순간을 견뎌낼수 있었음을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군가 육아 때문에 일을 포기하려는 고민을 하고 있다면 그 순간은 견디면 지나간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 좀더 희망적(?)인건 아이는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세상 밝고 유쾌한 아이로 자라고 있다.)
| 더 높은 곳의 사랑
아이를 통해 사랑의 높은 곳을 경험한다. 위에서 언급한 슬픔은 지나가는 순간이었지만 이 감정은 현재 진행형이고 미래진행형일 것이다. 아이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아이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면서 얻는 삶의 만족감은 아이를 낳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퇴근길은 참 설레고 행복하다. (아이가 잠들면 더 설레고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경험하고 나면 세상에 대한 민감도가 달라진다. 더 많이 공감할수 있게 되고 더 많이 느끼게 되고, 더 많이 보인다. 우리의 뇌는 깨달음의 크기만큼 행복의 질도 높아진다고 하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