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회사에서의첫출근을앞두고인사팀에서재택근무를위한프로그램설정을하기위해개인노트북을가져오라는안내를받았다. 회사일하면서쓸볼펜과클립, 포스트잇까지도사비로마련했던바로전직장을겪어서인지별생각없이노트북을가방에넣는데, 그얘기를들은오빠가 ‘회사일을하는데, 노트북을안준다고?’ 하고되물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채용 공고에서부터 입사 시 최신 맥북을 제공한다느니 광고하는 시대에 말이다.
그렇게맞이한첫주의마지막날. 마찬가지로회사일에쓰기위해잉크충전식프린터를샀다. 매일엄청난양의종이를뽑아대야하기때문이었다. 프린터까지샀다고이야기하면또한소리를들을까싶어서은밀하고조용하게오프라인으로처리했다. 그나마 모니터가 (무조건) 두개필요한데, 이미사용하고있던것이있어서돈을덜썼으니 그것 하나는 참 다행이었다. 재택근무를시작하며필요한장비를회사로부터제공받은입장에서 보면, 개인의 노트북으로 회사 일을 하고 프린터와 듀얼 모니터를 사야 한다는 건… (아니, 노트북이 없을 수도 있잖아!)
업무노트로 쓰던 나의 가죽노트. 물론 회사에서도 노트를 주긴 했다.
직장인이라면응당가져야할가장필수적인자세는바로 ‘큰일을봐도회사가서일과시간에보기’다. 응당직장인이라면종이한장이라도회사가서뽑고커피한잔이라도회사가서마시는자세를가져야내가하루내부분의시간을회사에서보내는값을개미오줌만큼이라도더받아낼수있다고들말하니까. 혹자는회사갈땐비싼화장품으로화장하는것도아까워서, 평일에쓰는로드샵화장품과주말에쓰는백화점화장품이따로있을정도란다. 회사에들어가는돈은십원한개도아깝다고. 또 다른 한 달을 풍요롭게 해 줄 작고 소중한 월급을 주는 회사가 과연 무엇이길래 화장품까지 가려 쓴단 말인가?
지난 6년 여의 직장생활 동안 나는 다양한 이유로 회사에 내 돈을 써왔다. 대체로 1) 약간의 지출로 일/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2) 나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위해, 3) 개인적인 만족감을 위해서, 회사에 돈을 쓰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다.
첫째, 약간의 지출로 일/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영어선생님으로일할때나의가장큰고민과걱정은바로 ‘수업자료’였다. 기왕이면재밌는걸하고싶고, 보기에도좋았으면좋겠는데, 그렇다고출근과동시에퇴근시간까지쉴 새 없이수업을해야하는입장에서교안을만든다는건퇴근후집에서까지일을해야한다는것을뜻했다. 그래서이곳저곳을뒤져education.com이라는다양한수업자료가있는웹사이트를찾아냈고, 첫해에는 1년권을, 두 번째해에는평생이용권을결제했다.
이백만 원 초반대의 월급을 받던 나에게 월급의 1/10 가량을 수업 자료 사이트에 지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선생인 나에게는 즐거운 저녁시간을, 학생들에게는 좀 더 완성도 있는 수업 자료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들다 보면 난이도 조절을 실패할 때가 있어 너무 복잡하거나 어렵기(또는 쉽기) 마련인데, 전문가들이 심사숙고하여 만든 자료다 보니 그런 시행착오를 겪을 일도 줄었다. 거기다 계속해서 새로운 자료가 업데이트되었기 때문에 지루함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한 번의 지출로 모두의 삶이 펀해지고 풍요로워진 것이다.
회사에 갖다 놓은 개인 물품 1: 스트레스 해소용 털무더기
둘째, 나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위해
내게 반드시필요한 건 아니지만 있으면 결코 나쁘지는 않은 일 친구(워크 메이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키보드와 마우스라고 답할 것이다. 대학교 입학, 아니 그 이전부터 이미 노트북을 써왔기 때문에 갑자기 무슨 키보드와 마우스 타령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하루에 여섯 시간 이상을 논문과 씨름했던 대학원 시절을 겪은 뒤 삐걱대는 손목을 본 후로 모두가 찬양하는 버티컬 마우스와 마치 구름을 치는 것 같다는(?) 기계식 키보드의 이로움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돈을 써서 나의 뇌가 강제로 플라세보 효과를 발산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손목의 통증과 손가락 저림 현상이 눈에 띄게 줄었다.
셋째, 개인의 만족감을 위해서
얼마 전, 회사에 아끼던 색연필을 가지고 갔다. 우리 회사에서는 프로젝트 마무리 전 피엠이 번역물의 포맷 등 비언어적 부분을 체크하기 위해서 FE(이름하야 최종 점검)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색이 있는 볼펜이다. 입사 후 줄곧 재택근무를 했으니, 그냥 기분에 따라 집에 있는 색색깔의 볼펜(정말 색색의 볼펜을 말한다 - 핫핑크부터 터콰이즈까지) 혹은 만년필과 색연필을 사용하다가 회사에 돌아와 기본으로 제공받은 빨간 펜으로 일을 하려니 영 일하는 맛이 들지 않았다. 결국 몇 년 전 생일 선물로 받고는 아껴두었던 나무 색연필을 챙겨 들었다. 이거지, 일하는 맛. 쫙쫙 줄을 긋는 맛.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기왕 일 하는 것, 회사에 돈 좀 쓰는 게 어떤가. 결국 일도 개인의 취향인데. 이 글을 읽은 모두는 회사에 어디까지 쓸 수 있나요? 펜? 포스트잇? 마우스??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