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연애, 기쁨.
4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어제는 생일이었고 휴가를 내고 가족들과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엄마와 여동생과는 비록 연락이 닿지 않았지만 아빠, 할아버지, 고모, 새어머니, 남동생 그리고 애인과 함께 봄의 충만함을 마음껏 느끼고 기뻐했다.
내가 생각하는 살기 좋은 세상은 행복한 사람들의 세상이다. 나는 엄마와 있을 때 행복하지 않았다. 엄마는 나의 행복을 질투했다. 그의 행복을 스스로 저당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남편과 가까워질 수 없었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아빠와 가까워지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엄마는 사실 스스로의 장애물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던 것인데 항상 불행의 원인을 외부로 돌렸고 나 역시 그의 불행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엄마 자신과 동일시하는 여동생을 제외하곤 대부분 엄마의 행복을 방해하는 원인으로 치부되고 평가절하 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늘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여동생을 부러워했지만 엄마로부터 떨어져 지내는 지금은 오히려 내가 엄마에게 타자화 된 존재였기 때문에 내 삶을 나름대로 잘 꾸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나의 행복을 연습하고 다져가는 과정이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여동생을 지원할 수 있을지도 고민하게 된다.
애인과 티격태격 싸우는 과정을 통해 내가 퇴행하고, 보상받고 싶어 하는 어린 시절의 나를 자주 마주하고 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애인을 엄마로, 보호자로, 상정해 놓고 나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달라고 강요한다. 단 하나, 애인이 나를 먼저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항상 내가 먼저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관계에서 권력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지배적인 쪽을 택해서 덜 상처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애인은, 늘 먼저 고백하고 헤어짐을 통보받는 쪽을 선택함으로써 상처 받고 버림받는 피해자로서의 페르소나를 주로 써왔다. 관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명확하게 이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두 가지 페르소나가 본질적으로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나는 애인을 통해 나를 보게 되고, 다시 나를 통해 애인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관계가 돌봄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전복되고 교차되는 것은 결국 내가 아이가 아니라는 것의 반증이기도 하다. 내 안에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지만 지금의 나는 만으로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은 성인이니. 끊임없이 받고 싶어 하는 마음 너머에 분명하게 자리 잡은 자아실현과 자아완성의 욕구가 내 안에 있다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때에 따라 나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쓸 뿐이고 어디에도 갇히지 않으며 다른 누군가와 연결된 존재로서 살아 숨 쉬어야 되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한다. 내 마음속에 걸리는 장애물들을 하나씩 넘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나를 만난다. 내 안에 있는 이 힘이 거대한 집단 무의식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넘어온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내일은 또 어떤 하루가 될까. 난도 높은 문제집을 푸는 것 같은 2021년의 말미엔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