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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모 Apr 16. 2021

니모의상담 일기#5

나의 첫 기억을 떠올렸을 때 좋은 기억이 떠오른다는 건 아마도 현재의 내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대 초반에 이 기억을 떠올렸다면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었을 것 같다. 이것이 나의 기억인지 아니면 사진이나, 커서 들은 이야기로 입력된 정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일광욕을 하던 생후 1년 이전의 장면을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상관계 이론을 공부하면서 생후 1년의 경험이 한 사람의 생애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알게 된 적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사랑을 담뿍 받았던 그 10개월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키운 자산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 이후의 기억은 부정적인 것들이 지배적이지만 적어도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첫 기억에 대해 원우분들과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 힘이 느껴진다는 피드백을 들었다. 맞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 이런 강인함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이기도 하고, 또 길러진 것이기도 하다. 조부모님은 강인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그분들께서 물려주신 바탕에 나의 경험이 덧대어져 지금의 내가 있다. 


세 번째 상담을 하며 사랑에 대한 나의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완전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나는 애인에게 기대한다. 부모님과 함께 지냈던 시간 동안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그런 따뜻한 사랑에 대한 보상 심리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선생님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려지는 사랑의 판타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수많은 신혼부부가 드라마와 자기 삶을 비교하며 괴로워한다고 말했다. 맞다. 세상에 그런 완벽은 사랑은 없지. 나의 애인은 사실 정말 충분하게 나를 사랑하고 있다. 


최근 들어 애인에게 내는 짜증이 늘었다는 것을 관찰하면서 나의 괴로움이 직장에서 비롯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직장에서 뺏기는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애인을 닦달했던 것이었다. 1월 이직 후부터 계속해서 신체적인 컨디션이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2월, 3월, 4월 어딘가 끊임없이 아프고 이번 주에는 자가면역질환이 심각한 상태가 되어 내리 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밤새 끙끙 앓으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고 퇴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곤 이야기를 했다. 


내내 고민했던 문제였기에 큰 미련은 없었다. 막상 퇴사를 말하고 나니 어떤 불안이 밀려왔다. 정규직 일자리가 없는, 사회에서 무능력한 사람이 되면 어쩌나, 하는 그런 불안. 상담에서 매번 나는 내가 불편하거나, 쓸모없거나,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까 두렵다는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동안 그 불안은 항상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공부를 잘하고, 동생을 잘 돌보고, 자기 일을 잘 챙기고, 예쁘고, 날씬하고 등등. 그런 기준들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머리로는 그런 기준이 아닌 나의 존재 자체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 감각이 아직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에너지가 떨어지면 그 불안이 증폭되고, 불안이 증폭되면 나는 내 안으로 점점 숨어든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나를 일으켜 세우는 존재가 새롭게 등장했다. 학부시절 친했던 친구가 유학생활을 마치고 아이 둘과 함께 귀국했다. 그것도 동네로. 우린 비슷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 전문직 부모님의 가학적인 양육 환경 같은 것에서부터 사회문화적인 관심사까지. 첫째가 태어났을 때 한국에서 잠깐 본 이후로 벌써 3년이 훌쩍 지났고 둘째 아이가 12개월 차다. 


나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무섭고, 울릴까 두려워서 가까이하기가 어려웠다. 친구의 아이여서 그런 걸까 이 작은 생명체가 온 힘을 다해 울고, 웃고, 세상을 탐구하는 것을 보면 번뇌와 망상은 이미 멀리 날아가고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 


나와 친구는 학부시절을 1세대 문화인류학자인 조한혜정 선생님과 함께 보냈다. 조한의 은퇴 직전, 그가 우리 같은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유산을 말하고, 글 쓰고, 체험하며 받았다. 조한은 우리를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니며 인간이 왜 함께 살아야 하는지, 왜 아이는 함께 키워야 하는지, 삶에서 가장 필요한 기술은 무엇인지, 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인지를 들려주었다. 우린 때로 조한과 싸우고,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우리는 그 시간을 기반으로 아이를 함께 키우고,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작당을 모의한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다음 세대에 우리의 상처를 물려주지 않는 것이고 조한이 전하고자 했던 것 역시 그랬다. 가르치지 않고 삶으로 보여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신자유주의에 지나치게 편승하지 않고, 적정 기술로 삶을 잘 보살피는 따뜻한 어른. 아이의 유년기를 함께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퇴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게다가 내가 헤테로 결혼을 할 확률은 희박할 것 같으니. 


내가 상담사가 될지 안 될지는 전혀 알 수 없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성적은 나의 가장 뒷전이 되었지만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자 노력했고, 지금도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실현하며 살고 있다. 제도 안팎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4월 16일. 떠나간 아이들을 가슴속에 품고 5월엔 친구와 아이들을 데리고 즐거운 여행을 떠나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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