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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모 Apr 22. 2022

니모의 명상 일기

<무경계> 켄 윌버

"예컨대 선불교에는 '본래의 깨달음은 영묘한 수행이다'라는 의미의 '본증묘수'라는 멋진 말이 있다. 합일 의식은 어떤 수행의 결과로 획득되는 미래의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합일 의식은 영원히 현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증묘수는, 진정한 영적 수행이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부터' 샘솟아 나오는 것임을 뜻한다. 


진실한 기도 속에서는 그대가 하나님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는 기독교 신비 사상의 가르침과 이 말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대 자신을 책망하지 말라. 그대가 나를 찾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그대가 나를 찾았다는 뜻이니라." 


이와 같이 모든 의미에서 우리의 영적 수행은 그 자체가 이미 목적지다. 결과와 수단, 길과 목적지,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이다.


영적 수행이란 그것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단지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컨대 좌선을 할 경우,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 좌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자신인 부처와 같이 행동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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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으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전수된 가르침은, 좌선을 시작할 때 아무 준비하지 않아도 이미 깨달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좌선을 하든 안 하든,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 불성이 있기에 수행 시 깨달음이 있는 것이다. 


본래 불성이 있다면, 우리가 좌선을 하는 이유는 우리도 부처님처럼 행동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길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선 수행이란 우리의 진정한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엄밀히 말해, 인간에게는 이 수행 이외에 또 다른 수행은 없다. 이런 삶의 방식 이외에 또 다른 삶의 방식이란 없다.


'본증묘수'를 이해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곧 수행이자 본래 깨달음의 표현이 된다. 모든 행동은 영원으로부터, 무경계로부터 일어난다. 단지 좌선, 찬송, 예배, 진언 명상, 성경봉독뿐만 아니라 접시 닦기부터 세금 내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이미 수행이며 기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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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작용하는 다른 모든 저항과 마찬가지로, 근원적 저항은 당신에게 우연히 일어난 어떤 것이 아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도 아니고, 당신의 동의 없이 저절로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근원적 저항은 당신이 부지불식간에 스스로 하고 있는 현재의 활동이다. 


우리는 왠지 현재의 전체적인 상태를 완전히 수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를 총체적인 현재로부터 달아나도록 밀어내는 아주 작은 긴장이 안쪽에 있다. 우리는 자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몸이 아니다. 나는 이런저런 욕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욕망이 아니다. 나는 나의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생각이 아니다.' 


나는 그 뒤에 남아 있는 순수한 자각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이다." 


<무경계>, 켄 윌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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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너무 어린가보다 


내 자신이 너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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