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3대가 함께 사는 집은 희노애락이 공존한다

대한민국 - 광주

by ClaraSue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 나간지 10년.

서울로, 해외로, 내가 세상에 나가 깨지고 엎어지는 동안 외할머니는 엄마 옆 동네로 이사를 왔고,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부모님네로 합가하셨다. 엄마는 변함없이 집안일을 하고 아빠와 할머니 식사를 챙겼고, 일을 나갔다. 부모님은 지금까지 살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기 전 잠시 작은 전셋집에 머무르고 있는 시기였다. 장성한 자식들이 돌아오리라 생각치 않았기에 30평도 안되는 작은 집이었다.

작은 집에서 안방은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가 생활하시도록 내 주고, 엄마와 아빠는 작은 베란다가 딸린 방 하나를 쓰고 있었다. 남은 방 하나는 길거리 쪽으로 창문이 하나 뚫려 있는 한 평짜리 방이다. 거의 고시원 방만한 크기다.


정신 차리고 보니 서른. 마지막으로 워킹홀리데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갈 데 없어진 나는 우선 가방을 싸들고 부모님 집으로 들어왔다. 작든 크든 마지막 최후의 보루,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염치 불구하고 몸 만한 가방을 끌고 그 좁은 방으로 들어갔고, 60세의 엄마는 말 없이 방을 내줬고, 90세의 할머니는 손녀가 이사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엄마 말이 맞다.


어렸을 적 우리가 불만을 표시하면, 집을 나가 어디서 어떻게 살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진짜로 부모님 집이 없어지고 오갈데 없게 되면 그제야 차갑고도 비정한 현실을 마주할 거라 했다. 어느곳에서도 마음 편히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주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어딜 가든, 제일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내 한 몸 누일 곳이 있는 숙소다. 방 값을 내면서 빠듯하게 살아보니 어떤 방이래도 돈 안내라고 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



감사히 이불을 깔고 누웠다.

그런데 창문 밖으로 고래고래 고성이 들린다. 집 맞은 편에는 술집이 있다. 커튼도 없는 방으로 가로등의 주황색 불빛이 그대로 들어온다. 나는 소리와 빛에 예민해서 잠이 들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뒤척였다.

엄마가 방이 갑갑할 테니 방문을 열고 자라고 문을 열어 주는데, 누워있는 내 발에 방문이 걸려서 반쯤 열리다 만다.

원룸에서 살때는 방문이랄 것도 없이 나 혼자였고, 룸셰어를 할 때도 커튼을 쳤으며, 하우스 셰어를 할 때는 방문까지 잠그고 다녔다. 나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한 내가, 갑자기 내 몸 하나 숨길데 없는 공간으로 강제 이주된 느낌이다. 나도 내 프라이버시가 있다고 운운했더니 프라이버시는 무슨, 계란프라이같이 쪄 죽을 소리 하고 있냐는 타박이나 들었다.


나도 더워서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이제 진짜로 잠이 하나도 안온다.




한국에서 재정비 시간을 가지면서 대학원 유학 준비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 나의 버킷 리스트를 마무리하면, 이제 더이상 욕심과 후회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나의 지난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유학을 위해 각종 시험과 지원서, 서류들을 준비하는 일. 그리고 학비 마련. 안 그래도 터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고 있는 나에게,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는 엄마는 질문을 던져댄다. 이제 앞으로 어떡할거냐, 어쩔거냐고.

그러고 보면, 우리 집은 자식들이 모두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독립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은 한번도 성인 자녀와 같이 살아 본 적이 없다. 최장 시간이 아마 한 두달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장녀가, 처음으로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것도 서로를 피할 수 없는 작은 집에!



영어 시험준비를 하고 영어로 에세이를 쓰느라 끙끙대고 있는 와중에, 옆에서 엄마의 불안한 한숨소리와 자책하는 소리를 듣자니 안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이 커져갔다. 얘가 이렇게 자리를 못잡고 다니는 것이 자신의 탓인가 까지 생각하는 하는 엄마를 보며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든다. 나도 엄마가 자식을 잘 키웠다고 자부심을 가지도록 해 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영원히 엄마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나를 이렇게 키웠잖아.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게, 불안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나의 길을 가도록. 너무 쉽게 정착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도록 그렇게 나를 키운 건 다름 아닌 엄마면서. 영어 서류 준비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 한 느낌까지 받으니 난생처음으로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왜 우리 집에서는, 아니 내 근처에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이 없을까. 나는 왜 하지 못할 일을 시도하고 있나. 어쩌면 엄마 말이 맞는 걸까? 나는 말도 안되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집에 사는 동안에는 최대한 허리끈을 졸라매고 독하게 돈을 모아보자! 라고 결심한지 며칠 만에 나는 결국 커피값을 지불하고 스타벅스로 피신했다. 도저히 집에 있으면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와 엄마의 질문 공세를 버틸 수가 없어 돈과 마음의 평화를 맞바꾸기로 했다. 평일 오후 햇볕이 잘 드는 까페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있으려니 이것이 자본의 맛인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 큰 자식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쉽지 않았다. 내가 만약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해외에서 홀로 살아내보지 않았다면, 그래서 때로는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나의 가족을 절절히 그리워해보지 않았더라면, 아마 함께 살지 못했을 것 같다. 함께 사는 과정은 서로를 또 다시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엄마'도 '인간'이라는 것, '자식'도 '성인'이라는 것을, 서로 상처주고 부딪히면서 서서히 인정하고,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 엄마와 나는, 서로에 대한 기대와 원망과 죄책감과 고마움, 그 모든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관계고, 그리고 우리 엄마와 외할머니의 관계도 그렇다.


어른을 집에 모시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집은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두 분 다 모신 적이 있다. 그리도 두 분 다 점점 몸도 정신도 아기가 되어 갔다. 두 번의 경험은 나에게 결국에 모두들, 이렇게 노인이 되어 갈거라는 진실을, 그리고 태어나는 것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었듯 죽음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려 주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엄마는 할머니 나이가 되고, 나는 엄마 나이가 되겠지. 나는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가.





공부를 할래도 돈이 필요하고, 새로운 걸 배울 때도 돈이 필요하다. 여행을 갈래도 돈이 필요하고, 좋은 경험을 쌓을래도 돈이 필요하다. 하나도 불안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있어야 하는 건 아닐지라도, 무엇을 하든 적어도 어느 정도는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수입원이라는 걸 확보하는 것이 참 쉽지 않다. 수입원을 확보한다 해도 유지를 위해서는 나의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지방에서 취직을 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얼마나 서울중심적인 사람이었는지. 하긴 자라는 내내 부모님으로부터 서울로 '진출'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살았으니. 어떤 사람들은 딸을 서울로 보낼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강경했다. 서울. 그곳이 내가 갈 곳이었다. 그런데 결국 나는 이렇게 고향, 지방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두 가지 잡에서 연락을 받았다. 한 곳은 공공기관 계약직이었고, 한 곳은 어학원이었다.

계약직 자리는 국제 회의, 페어 등을 진행하는 포지션 이라 해서 관심이 있어 면접을 보러 갔다. 그런데 사무실에 들어설 때부터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뛰쳐나왔던 조직문화, 내가 등 돌렸던 사무직이었다. 나말고 면접을 보러 오신 다른 분들은 이 계약직 자리에서 시작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걸 목표로 하시는 분들이셨다. 면접관 분들도 당연히 나의 목표가 그것일 것이라 단정짓고 계셨다. 나도 내가 그 면접에 가기 전까지는 확실히 몰랐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면접 후, 나는 아직 내가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두번째 어학원 일자리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생 때 과외를 몇 번 해 보면서 내가 굳게 다짐한 것이 있는데, 죽어도 한국의 사교육 시장에 기여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잘 알고 있다. 사교육으로 뛰어들면 적어도 돈이 된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이렇게 학생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시스템에 일조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공부’를 시키는 건지 그 의미조차 모르겠다. 공부란 사람을 성장시키고 사고능력을 기르고 결국에 자신과 사회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한국의 사교육시장은 대부분 ‘수능’과 ‘시험 점수’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사교육 뿐 아니라 한국 교육시스템이 그렇다. 일년에 네 번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보고, 등수와 성적에 집착하고, 한국의 고3 시기를 지내본 나는 뼈저리게 그 불합리성과 악독함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교대나 사범대를 필사적으로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르치는 걸 좋아하고,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어학원 일자리에 그나마 기대를 가지고 나의 ‘가치관’과 타협한 이유는, 학생들이 학습에 이미 찌들어버린 중,고등학생들이 아닌 초등학생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어를 재미있게, 문법과 문제 풀이 위주가 아닌, 자연스러운 게임과 동화책을 통해 가르칠 수 있을 거라는 거였다. (적어도 입사 전까지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내가 너무 순수한 사람이었을 뿐..) 해외생활을 하면서 영어의 중요성을 아주 잘 아는 나는 어린 학생들이 영어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래서 진심으로 영어를 배우고 싶도록, 그렇게 가르치고 싶었다.



한번도 안 해 봤지만,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못할 일은 아니라는 거겠지. 재미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 어학원 영어강사가 되었다.

이번 일은 지금까지의 일과 또 완전히 달랐다. 사무직과도, 서비스직과도, 단순 노동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