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드디어 새해를 맞이하여 본격적으로 내가 속한 프로젝트가 시동을 걸었고,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네덜란드 루테른에 모였다. 이 프로젝트는 조직 문화를 바꾸기 위한 것으로, 각각 다른 팀(인사, 법무, 홍보, 교육, 감사 등)과 다른 나라 각 지부들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다. 다른 팀, 다른 나이, 다른 직위, 다른 문화, 다른 언어, 다른 사무실이지만 같은 목표와 열정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일주일간 회의를 했다.
나는 아직 신참내기라 모든 것이 낯설 뿐더러 이렇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 (아직 우리 팀 사람들도 대면으로 만나지 못했다) 긴장하고 동시에 신이 났다. 이번 경험을 통해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나도 앞으로 나태해지지 말고 더 공부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물론 영어 영어 영어
아무리 영어로 석사 논문을 썼다 해도, 영어가 자연스럽다 해도, 여전히 나에게 영어는 제 2외국어다. 아직까지도 모국어처럼 나오지 않는다. 이번에도 한국에 한달 있다 오면서 영어가 금세 퇴화해 버렸는데 그것 때문에 이번 회의에서 진땀 뺐다. 언제쯤이면 수준높은 단어를 까먹지 않고 구사하면서 원어민처럼 말을 할 수가 있는걸까. 토종 한국인에게 영어는 끝나지 않는 숙제다.
2. 준비 없이도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발표 할 수 있는 능력
그래도 그나마 학교 수업 1년 하면서 영어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연습을 어느정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많은 연습이 필요할 듯 싶다. 우리는 이번 회의에서 일주일 내내 30명쯤 되는 사람들이 둥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 회의를 했는데, 그 말은 곧 30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계속 발표(?)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자기 소개해 보세요, 같은 단순한 질문 뿐 아니라 방금 우리가 함께 한 활동에 대해 자신의 피드백/소감 말하기 같은 질문들이 훅훅 들어온다. 단순하게 좋았어요, good, Nice 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본적으로 굿이면 왜 굿인지, 별로면 왜 별로인지, 더 나아가 동시에 내 생각에는 이러이러한 것도 더 있었으면 좋았을것도 같다, 라는 첨언까지 쉴새없이 자신의 생각들이 쫙쫙쫙 나온다.
자신의 생각을 발표 혹은 토론에 참가 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음과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해야 한다. 누가 발언을 하면 세가지 반응이 대개 나온다. 일번. 전적으로 공감한다면 왜 공감하는지를 구체 사례와 함께 얘기한다. 이번. 공감할 뿐 아니라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것도 추가해서 말한다. 삼번. 반대한다면 왜 반대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역시 구체 사례와 함께 제시한다.
한마디로 끊임없이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으면 할 말이 없고, 자신의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조리있게 말하는 능력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방식'과 '논리적 주장전개'가 모든 사람에게 굉장히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듣고 받아적기만 하는 교실에서 받은 교육으로는 나오기 힘든 능력일 것이다. 하긴 그런 능력이 있어도 한국식으로 위계질서가 강력한 조직에서 옛 시집살이 하듯 귀막고 3년, 눈 감고 3년, 벙어리 3년 지내고 나면 예스맨이 될 수밖에 없지만...연습하는 방법은? 말 그대로 혼자서도 끊임없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모든 결정 사항에 대해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 그리고 각각의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상사가 앞으로는 회의를 월요일이 아닌 화요일에 하기로 했어, 라고 하면 '네'가 아니라 '월요일에는 주말에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해서 다들 바쁘고 화요일 오전에 모두 시간이 비니 화요일에 하는 게 좋겠네요!' 라고 동의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그냥' 이 아닌 '왜'를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생각이 덧붙여지게 된다.
만약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고 생각하는게 귀찮고 골치아프면, 안타깝지만 서구권 조직에서 성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3. 다양한 이슈에 대한 자신의 명확한 가치관
발표할 때 필요한 '자신의 생각'에 대한 내용과 이어지는데, 아마 입사 인터뷰 등에서 걸러지겠지만 특히나 자신이 이 조직에 왜 들어왔으며, 무엇을 할 수 있고,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가치관이 없다면 토론이 쉽지 않을 것 같다.
특히나 사기업이 아닌 비영리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들을만큼 자신의 이상이 확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자신의 이상과 조직이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비전을 공유하는지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번 회의 중 미래비전 관련된 세션에서 생각할 틈도 없이 훅 들어온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당신이 지금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나서 행복한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의 여러 문제 중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뭐든지 할 수 있을 만한 돈과 권력을 가졌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는가.
-100년 뒤의 사람이 당신 앞에 서 있다면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당신은 그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가.
나는 아니 무슨 이런 심도 깊고도 철학적인 진지한 질문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대답하라 하는겨, 하고 어벙벙 하고 으음.....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문제 듣자 마자 자신의 생각을 술술 말하고 있는거다. 오마이갓. 심지어 이번 세션은 두 세명씩 나눠서 하는 토론이라 피해갈 수도 없었고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다행히 나는 이런 류의 질문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답을 하긴 했는데 얼마나 설득력있는 이유를 댔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서로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대화를 할 때, 비영리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역시 사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또 (내가 너무 일반화 하는 걸 수 있지만) 사람들이 대개 정치/철학/심리/역사/문화/예술 등의 다양한 인문학 분야에 적어도 한개 이상 흥미가 있고 지대넓얕 수준까지의 지식까지는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이슈에 대해 왜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드러나는 문제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여유로운 토론이 가능하다. 물론 과학에 대해서도.
그런데 특히 그 중에서도 자신이 특히 관심있고 공부한 분야가 꼭 있다. 환경문제, 인종문제, 종교문제, 젠더문제, 등등, 그런 자신이 관심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심도 깊게 이야기를 한다.
이런 점에서도 사기업과는 달랐다. 사기업에서는 일부러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예민한 사회문제들을 꺼내기를 꺼려하는데 여기서는 다들 비슷한 성향이려니 생각하고 안전하게 느끼고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를 한다는 점. 어쨌든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해 공격적이지 않게 자신의 의견을 유려하게 펼칠 할 줄 아는 능력...필요하다.
4. 말하기 뿐 아니라 뛰어난 글쓰기 능력
당연히 영어로 이메일 뿐 아니라 제안서, 기획서, 발표 자료, 보고서, 외부 홍보 자료, 내부 홍보 자료, 교육 자료 등등을 써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하는 바일 것이다. 그런데 사기업과 비교해서 훨씬 더 공들여서, 유려하게 문서를 작성하는 것 같다. 기부금과 지원금으로만 운영하는 NGO가 모든 의사단계 결정에서 투명성을 중시할 수록, 모든 것은 기록되어야 한다. 누가 와서 갑자기 보더라도 거리낄 것 없게, 의사결정단계의 거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문서화 시킨다는 말이다. (거의 공무원 수준임) 그러다보니 모든 글에 논문 수준으로 참조용 하이퍼 링크들도 엄청 들어간다.
사기업보다 읽는 사람을 '설득'하는 것에 방점이 더 맞춰져 있는 것 같다. 한마디로 마음을 움직이는 글쓰기를 해야 하는 것 같달까. 다른 해외 취업하신 분이 쓰신 글에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읽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스토리텔링이다. 일하는데 왠 스토리텔링? 인가 싶지만 우리 팀에서 사람 한 명 뽑고 싶다는 이야기 하는데도 서류 두세장이 넘는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진다. 배경부터 시작해서 어떤 사람을 뽑을 것인지 어떻게 뽑을 것인지 어떤 일을 시킬 것인지 월급은 무슨 돈으로 줄 것인지...그 이야기를 읽고 나면 전혀 앞뒤 사항 모르는 사람도 아 그래서 이 팀이 사람 한 명 뽑으려 하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정도 글을 써야 되는구나, 여기는.
5. 셀프 케어가 가능한가?
일주일동안 이어진 회의도 우리 팀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프리했다. 아무도 제 시간에 오라는 사람도 없고, 피곤하다고 오후 회의 빠져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만약 누군가 물어본다면, 수긍할 만한 근거 - 몸이 안 좋아서 쉬었어, 라던지 다른 줌 미팅이 있어서 등 - 가 있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이 빠진 것에 대한 책임은 또한 자신이 진다. 부탁하지 않으면 아무도 늦잠 잔다 해서 깨워주지 않고, 빠졌다 해서 중요한 자료를 챙겨주지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이 되면 다르겠지만)
반대로 끊임없는 미팅과 쏟아지는 일 사이에서 스스로 밸런스를 맞추며 쉬는 시간도 간간히 가지고, 정말 못하겠으면 빠진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통제가 느슨하고 자율을 주는 대신 확실히 공동체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단체 케어(?)가 덜하다. 다 같이 무조건 아침 먹으러 가고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쉬고 하면 무언가 강제로라도 규칙적인 생활, 사회 생활을 하게 되는데, 혼자서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혼자 놀기와 혼자 일하기의 달인인가? 그렇다면 좀 더 쉬운 듯.
대개 자율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일 안하고 늘어질 가능성을 생각하는데 오히려 잘못하면 일과 사생활의 선이 애매해져서 오히려 일을 더 할 확률도 늘어나는 것 같다. (어쨌든 해야할 일의 양은 정해져 있으니)
왜냐하면 자율성을 장려하는 분위기일수록, 사람들이 시키는 일 뿐 아니라 시키지 않는 일까지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팀이나 상사가 어떤 제안을 하면, 아 그것도 좋네요. 덧붙여서 이런건 어때요?까지 나올 줄 알아야 인정 받는다는 말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자료를 읽어보고 피피티를 만들어 봐'라고 하면 피피티도 만들고, 추가로 요즘 동영상이 더 뜨고 있다며 동영상도 만들어 내던지, 아니면 그 주제에 관련한 컨퍼런스가 다음달에 있다는데 거기 가보겠습니다, 혹은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팀의 누구누구를 소개시켜 주실 수 있으세요?까지도 기대되는 자세인 것이다. (이 열정들!!!!)
결국 마찬가지로 본인의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 것 같다. 이게 어찌보면 큰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스트레스는 일잘러들 사이에서 번아웃과 임포스터 신드롬에 시달리지 않고 압박감 관리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고, 또 다른 것은 자신의 이상과 오히려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만 들때 - 특히나 비영리기관에서 일하면서 가지는 기대가 있을 텐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무너질 때마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갖가지 스트레스에 만약 나같이 타향에서 혼자 외롭게(?) 일하는 사람이라면 향수병까지도 걸릴 수 있을 것인데, 영어 보다 더 사람을 나자빠지게 하는 문제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어떻게서든 이겨낼 수 있는 능력(Resilience) 가 필수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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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던 바이긴 했으나 막상 닥치니 힘들고도 놀랍다. 그래도 재미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자신감(혹은 근자감)으로 여기까지 왔다.
더 빨리 오지 못해서 항상 안타깝다 생각했지만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그렇게 돌아 돌아 오지 않았다면,
여기 오지 못했겠구나, 와서도 버티지 못했었겠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와서 나는 오히려 나의 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