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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Jul 10. 2023

나의 첫 비폭력운동 참여일지

My first non-violent action


노동운동이건, 인권운동이건, 환경운동이건, 정치 활동이건 나는 그런 단체 활동을 해본 경험이 없다.

내가 해본 비슷한 경험은, 투표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시위에 단 한번 참가해 본 것 뿐이다.

나의 가족, 친지, 친구 중에도 사회나 정치 운동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했던 사람은 없다.


아, 막상 쓰려고 하니 있긴 있다.

우리 막내 이모와 이모부가 서울대 학생운동을 하셨는데, 나는 그것도 우리 엄마에게 스쳐지나가는 말처럼 말만 들었지, 두 분께 실제 경험을 들은 일이 없고, 내가 오로지 본 모습은 평범한 가장과 가정주부로서의 모습, 그래서 두 분이 '민주화 투사'?였다는 것이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건립된 이래로 독립운동, 전쟁, 독재 시기를 거쳐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민주화 운동, 학생 운동, 노동 운동으로 점철된 시기였는데 90년생인 우리 때가 처음으로 '안정된 사회'에서 자란 세대가 아닐까.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를 '시민 단체' 의 활동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았을까, 기껏 획득한 안정과 평화를 누리는 것에 집중하도록.

과거의 집단적 트라우마도 벗어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이도 하다. 나는 광주 출신으로 시위 나갔다가 총맞아 죽었다는 이야기, 산을 넘어 필사적으로 도망쳤다는 이야기만 어렸을 때부터 주구장창 들었고, 내가 아는 주변 어른들은 모두 그런 '튀는 행동'을 했다간 '종철이'처럼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고, 위험하다고 가만히 공부나 하라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일제 부터 독재를 거쳐 만들어진 교육 체제가 권위에 복종하게 만드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었지 반항적인 민주 시민들을 만드는데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특히나 진작부터 안정된 민주국가에서 교육을 받아온 '선진국' 출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과 우리의 교육 방식의 차이가 뚜렷이 느껴진다.


어찌됐건, 사회 운동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나였고, 그렇게 절대 '위험한 사회 운동'따위에 절대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보호받던 내가, 혹 다른 사람과의 차이가 있다면 두 가지인것 같다. 첫번째로 나는 어떤 사람이 물리와 천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 처럼 사회 문제에 관심과 흥미가 있었고(우리 가족의 말에 따르면 뼛속까지 문과출신이다), 두번째로 흑인 인권 운동의 발상지였던 알라배마와 시위가 밥먹듯이 일어나던 프랑스에서 살아보았다는 것이다. 알라배마에서 나는 마틴루터 킹과 말콤 엑스의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비폭력 vs 혁명)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규모 가두 시위에 참여하고 아무도 불편하다,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회를 배웠다. 그것이 나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기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라는 집단주의적 시각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내가 '사회운동'에 참가할 만큼의 '전사'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고, 참여할 기회도 없었으며, 혹여나 시위를 하거나 무언가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멀리서 구경하면서 '와...저런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대단하다.' 라는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그들이 부러웠다. 적어도 단순히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더 큰 '무언가'를 위해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것이 남 보기에 옳은 가치든, 그른 가치든, 대체 무엇이 그들을 기꺼이 저런 '고생'에 참여하게 만드는가.



나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일, 돈을 벌기 위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라는 생각을 포기 하지 않았기에 이제와서라도 NGO에 들어가게 된것 같다. 그건 아주 아주 서서히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너무 천천히 가서 변화가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슈퍼카 타고 명품백을 아무렇지 않게 사는 사람들의 그룹보다 같은 가치를 가진 사람들과 한데 뭉쳐서 뭔가를 이루어내는 사람들의 그룹에 더 들어가고 싶었다. 나의 삶은 나의 세례명을 따라가는 걸까?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처럼, 부 보다는 자신의 가치를 따라가는 삶으로?






막상 NGO 에 들어왔건만, 나는 활동가나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나는 조직 운영부다. 그 말은 곧, 무언가가 일어나는 운동 현장에서 아주 멀리 멀리 떨어져있다는 말이다.

그 깨달음은 내가 이 단체에 들어온 이유가 뭘까, 나의 일은 과연 이 단체에서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를 고찰하게 만들었다. 회사로 따지면 영업부와 영업지원부서의 차이와도 같다. 나는 시민단체에 들어온 만큼 최전선 현장에서 뛰고 싶은가? 아니면 뒤에서 보조하는 일로도 만족하나? 영업지원 부서인데 영업을 모르면 어떻게 지원 정책을 만든단 말인가? 탁상공론이 되는게 아닐까? 시민단체 활동의 새내기로서, 그리고 이 단체의 새내기로서, 나는 대체 우리 단체가 정확히 뭐하는 단체인지 '말로만 듣고 배울 뿐',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 조직의 1번 가치는, 비폭력운동이다. 비폭력적인 방법,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해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또 알게 된 사실은 아무나 운동가를 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식 활동에 참가하려면 (우리 단체에서는) 공식적으로 활동가 교육을 수료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우연찮게 전세계 지부 중 제일 빡세고 체계적이라는, 독일에서 하는 교육을 받게 되었다. 4일간 단체 합숙을 하면서 교육을 받는데 (최장 교육기간이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름 '극한' 까지 몰고가는 교육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육의 적합성에 대해서도 내부에서도 논의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빡세다는 말은 들었어도 그 정도로 빡셀줄은 몰랐는데, 해병대 교육처럼 단순 체력적으로 굴리는 것 뿐만 아니라 소화해야 할 것이 많은, 배울 것이 빡빡한 일정이었다. 설명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하지만 '기밀'이라고 하니 더 설명할 수가 없다.



약간, '이래도 너 활동가 할거야? 이래도?' 라고 오히려 이건 너랑 안맞는 길일 수 있다, 라고 사람들을 포기시키는 프로그램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나는 하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추후에 활동가가 되는 것이다. 삼일차 되니 나도 정신적, 체력적으로 쪼달리는 상황에서 대체 내가 왜 이런 위험과 고생까지 감수하면서 시위를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모든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내가 믿는 가치는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교육을 완수하고 몇달 후, 나에게 카약 시위에 참가하고 싶냐는 메일이 도착했다.

나는 유럽에서 외국인인 신분인만큼 불법 시위에는 참가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번 시위는 함부르크 시청에서 허가를 받은 공식 시위라고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메인 참가자들은 청소년 단체로, 이 경험이 요즘 우리 팀이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청소년 활동가 보호 정책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팀장님이 적극 지원했다. (우리 팀장님은 자기는 지원팀이라고 하면서 팀원들을 자꾸 활동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나는 난생 처음 카약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시위는 월요일 오전에 예약(?)되어 있고, 일요일 오전부터 참여할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점심 먹고, 설명 듣고, 오후 내내 카약 트레이닝을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더 필요한 부분 있으면 보충하고 (배너 추가로 만들기 등) 내일 출발 준비를 모두 한 뒤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


메인 스케줄은 이렇다. 그래서 나는 그런 줄 알았다. 가서 카약 좀 타고 돌아올 줄 알았다.

그것은 레저 카약만 알고 있던 나의 착각.  메인 참가자들이 청소년 단체라는 것은, 나머지 성인들이 최대한 노동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좋은 일 하겠다고 오는 청소년들을 잘 가르치고 동기 부여를 시켜줘야지 고생만 시키고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


우선 일요일 점심 먹고 트레이닝을 바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일요일 오전부터 카약 준비가 모두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토요일 저녁에 도착해서 하루 자고, 일요일 오전부터 다른 사람들과 50개가 넘는 카약과 노를 꺼내고 구명조끼를 챙기는 등 부지런히 움직였다.

단체는 한번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팀을 나눠서 진행되는데 안전 요원팀, 보트 팀, 미디어 팀, 육지 팀, 성인 팀 1, 성인 팀 2, 청소년 팀 1, 청소년 팀 2, 대형배너 팀 이렇게 나눠졌다. 각각 팀별로 카약 트레이닝을 하는데 독특한 점은 혼자 하는 카약킹이 아니라 단체로 하는 카약킹이기에 "함께 하는 것들"을 연습해 본다는 것이다. 줄지어 가는 연습이라든지 서로 연결해 가로로 길게 늘어선다던지 각종 대형을 만들다든지 하는 것이 일반 카약킹과 다른 점이었다.

나는 카약킹 한지 몇년 되어 내가 잘 할수 있으려나 조금 걱정했는데 막상 카약을 타니 그래도 몇번 해본 깜냥이 있다고 몸이 기억했다.




카약은 참 재미있다.

재미 없는 부분은, 그 카약을 물에 띄우기까지 이고 지고 나르는 부분이다.

트레이닝이 끝나고 드디어 내일을 위해 짐(?)을 싸는데 50개가 넘는 카약을 (크기도 다르고 무게도 다르고, 카누 등도 섞여 있어서 더 골치 아팠다.) 트럭에 다 싣는데만 한시간이 걸렸다. 다음날 아침도 마찬가지로 함부르크 시청 앞 호수에 가서 그 카약을 전부 물에 띄우는 데만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 드디어 모든 카약이 물에 들어가고, 함부르크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줄지어 호수로 입성.



이번 시위는 기후 변화로 인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기후 난민을 난민으로 인정 해 달라는 법안에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시위였다. 월요일 아침, 사람들은 다들 호수를 산책하거나 출근해서 일하는 중이고, 우리는 그 사람들 틈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참 할일도 없는 사람들이다, 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저렇게 한다고 뭐가 바뀔까 하면서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고. 그 와중에 어떤 사람들은 와, 신기하다, 멋지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활동이 누군가 한 사람에게라도 가 닿기를, 한 명의 생각이라도 바꾼다면, 한 명의 행동이라도 바꾼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물론 더 크게는 여론과 사회 정책에 영향을 끼치기를 바란다. 더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도록.


함부르크에 처음 왔을 때 이 호수를 보고 와 정말 멋지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이 호수 안에서 카약을 타고 시위를 하게 될 줄이야. 이역만리 독일에 와서 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한 운동' 에 참가하고 있다. 인생이라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시위 시간은 서너시간이라 그다지 길지도 않았다. 아침에는 비가 좀 흩뿌리더니 다행히 비가 오지 않고, 해가 너무 쨍쨍한 것보다는 살짝 구름이 껴 날씨도 완벽했다. 그래도 더웠지만. 카약킹이 끝나고 나서 모든 카약을 다시 트럭에 싣고, 창고로 돌아와서 카약을 다 내려서 씻고 정리하는 것 까지 우리의 일이었다. 활동이 끝나자 청소년 단체들은 각자 자신들의 시간(후기 공유하고, 피드백 주고 등등)을 가지고, 나머지 활동가들은 월요인인 만큼 오후 일을 하러 출근했다. 오전에 시위하고 오후에 출근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같은 느낌일까.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뿌듯하고 행복해 보였다.


함께 활동에 참가하고 나면, 함께 한 사람들간의 아주 끈끈한 우정같은 것이 생긴다. 고생을 함께 한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감정이랄까. 그 것도 중독적인 것 같다. 단순한 취미생활 모임에서 느끼는 것과 차원이 다른 소속감. 우리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을지라도, 서로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게 될것만 같은 소속감.


청소년들 뿐 아니라 성인 활동가들과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이 있었는데, 다들 어렸을 때부터 학교 등지에서 사회 활동을 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그것이 나와 다른 점이었다. 환경이든, 인권이든, 차별이든, 성정체성 문제든, 학생회 활동이든 클럽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한국의 교육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나는 시위 현장의 처음부터 끝 (물론 플래닝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해서 훨씬 이후에 끝난다) 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의 20%, 30% 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는 모두 뒤에서 엄청난 노동과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약간 내가 투어리즘에서 일할 때를 생각나게 한다. 고객들이 경험하는 '재미있는 시간'은 일의 전부가 아니다. 그 재미있는 시간을 위해 뒤에서 진행되는 일이 (특히 노동..)이 많은데 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그것도 불법시위도 아닌 공식적인 시위였지만 그것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특히 규모가 커지수록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추가로 다른 점은, '자발적인 참여'라서 그런지, 반드시 모두가 공평하게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없이 그냥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만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뒷정리를 안하고 그냥 몸만 쏙 빼서 가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적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불평 없이 그냥 했다. (나는 조금 불평이 있었지만ㅎㅎ)  

만약 이렇게 자발적인 참여에 의지한다면 하겠다고 남은 사람이 3명 뿐이면 어떡해?  3명이서 어떻게 카약 50개 + 짐들을 정리해? 라고 내가 물었는데, 그럼 셋이서 그냥 하는 거지 뭐...라는 대답을 들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언제나 항상 남은 사람들이 있어서 정리를 도왔다고. 흠...사람들은 참 이상하고도 놀라운 존재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라고 지금껏 배우고 경험하고 믿었던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경험해 가면서 나 자신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시 생각한다.


사실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함부르크까지 가려면 총 4일을 꼬박 써야 하는데 내가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나 싶었고, 귀찮기도 했고(카약 나를 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과 부대껴야 하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돌아보면 언제나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을 고민했을 때, "하는 것"이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듣고 보고 배우고 해보고. 난생 처음 독일 뉴스에도 나와보고.


아래 사진을 찍는데만 십오분이 넘게 걸렸다. 다른 사진들도 마찬가지다. 멋진 결과 뒤에는 언제나 엄청난 고생이 있다. 함부르크에 다녀와서 회복하는데 일주일 넘게 걸렸다. 활동가가 되려면 체력을 길러야한다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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