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개구리인 것인가?
나른한 금요일 오후,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오피스에 출근해서 커피를 내린다.
그나마 월-목은 사무실 느낌이 나는데 금요일은 거의 사람 없는 적막한 도서관 느낌이다. 너무 조용해서 말도 속삭여야 할 것 같다. 커피머신 앞에서 만난 동료에게 와, 오늘 너무 조용하네요! 했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금요일이 대개 그렇잖아, 라고 한다.
커피를 홀짝이며 컴퓨터 앞에 앉는데 새삼스럽게 조금 행복하다.
출근했는데 행복한 이 상황에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온다.
나는 서울과 상해, 고층 빌딩들이 밀집한 금융권 지역의 모두가 내려다보이는 타워 오피스에서 일했었는데, 사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지역, 부러워 할 만한 오피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절머리나게 출근이 싫었다. 제발 재택근무를 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었고, 재택근무가 아니라면 까페라도 가서 일하고 싶었다. 평일에 출근하고 나면 주말에는 아예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나는 '오피스', 그래 '사무실'을 싫어하던 사람인데, 그런 내가 사무실을 사랑하고 자발적으로 출근을 하다니..? 그렇게 출근하라고 할 때는 출근하기 싫었는데, 출근하지 말라고 하니까 나는 매일 꼬박꼬박 출근하고 있다. 이건 대체 무슨 청개구리 심보인가.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번째는 오피스 자체다.
암스테르담 오피스는 구성이 위워크같은 공유 오피스 같은 분위기다.
대개 팀별로 앉는 자리가 비공식적으로 정해져 있긴 하지만, 출근하려면 책상도 예약해야 한다.
내 책상은 없지만, 각 책상별로 모니터도 있어서 나름 편하다. 커피도 공짜(?)로 먹을 수 있고, 전세계(?)에서 출장 온 사람들이 가져온 간식들+과일이 구비되어 있다. 음식이 없는건 좀 아쉽지만, 큰 키친이 있어서 도시락 먹기도 좋다.
숨막힐 것 같은 답답한 사무실 느낌이 아니고, 화분도 많아 사무실이 녹색 가득한 까페 느낌이다.
큰 창들이 천장까지 뜷려 있어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다.
오피스는 운하와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공원뷰, 물뷰(?) 도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
위층에 크게 발코니/옥상도 있는데 날씨가 좋으면 그곳에서 하루 종일 일할 수도 있다.
우리 집에서 오피스로 씽싱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도, 공원을 뚫고 오는 길이라 예쁘고 상쾌하다. 매일같이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을 했던 걸 생각하면 당연히 출근이 싫었을 만도 하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적어도 일주일에 3일 이상 재택이 가능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특히나 금요일은 출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을 매일 보지 않고 가끔 봐서 반갑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확실히 적다.
두번째는 자율성이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규율을 싫어한다. 일분 일초까지 정확하게 각 맞춰서 정해진 룰을 따라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5분 늦게 자리에 앉는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반드시 그 시간에 와야할 이유도 없는데? 회의가 있거나 중요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시간을 엄수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내가 5분 늦는다고 해서 엄청나게 큰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왜 반드시 그 '시간'을 지켜야 하는가, 그것도 매일 매일.
나는 그냥 그 생각 자체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덜 일하겠다는 게 아니다. 5분 늦게 와서 5분 늦게 가면 안되나?
시간 엄수는 통제를 위함이다. 고용주가 고용인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 그래서 이해 한다.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을. 나는 지금까지 회사와 나의 관계는 당연히 '통제'에 기반한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우리 조직은, (너무나도 큰 우리 조직을 대변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 팀은, 그리고 우리 팀장님은 나에게 처음으로 '믿음'을 주었다.
우리 팀은 자유롭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팀 회의와 팀장님과의 일대일 미팅 1번만 들어가면 된다. 100% 재택 근무라 다들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고, 금요일은 가능한 한 회의 없는 날(노 미팅 데이) 이며, 사실상 다들 주 4일 근무를 하는 중이다.
나는 출근시간도 내 맘대로고, 퇴근시간도 내 맘대로인 반 프리랜서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회의가 오전부터 잡히기 때문에 마음껏 늦잠을 잘 수는 없지만, 그냥 내가 나의 스케줄을 짤 수 있다는 자율성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나의 행복감 + 업무 능률 을 올려준다.
주 4일 근무라고 해도, 팀원들의 업무량은 4일간 주 5일 근무량(40시간)을 넘는다. (왜? 일이 많아 ㅠㅠ)
어차피 매주 있는 팀 회의와 팀장님 보고때, 꼬박꼬박 성과와 진행상황을 업데이트 해야 하기 때문에 농땡이 피울 수도 없다. 오히려 일을 더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팀장님 앞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 모습을 보이면, 결과물이 안나와도 어쨌든 일했다는 증거가 되는데, 이렇게 자유롭게 하라고 풀어줘버리면, 내가 일했다는 증거를 내놓기 위해 더 확실히 일해야 한다.
집에서 일하고 싶으면 집에서 일하라는데, 나는 막상 집에서 일 하려니 답답하다.
결국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침에 일어나 모닝 루틴을 하고 짐을 싸서 사무실로 출근한다. 나의 업무 능률과 집중력을 올리기 위해서. 재택근무만 하느라 느낄 수 없는 팀원들의 빈자리를 나와 같이 오피스로 종종 출근하는 사람들과 교류하며 채운다. 내일은 각자 먹을 거 싸오는 포트럭 파티를 점심때 하기로 했다.
가끔씩 비가 쏟아져서 출근하기 싫으면 출근하지 않는다. 그러다 오후에 비가 개면 또 자전거를 타고 바람 쐴 겸 사무실로 나온다. (거의 대학원생때 출근 도장 찍었던 도서관 수준이다...)
한국에 있을 때, 생리통이 너무 심해서 약을 먹어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사무실 컴퓨터 뒤에 앉아 있었다. 자리에만 앉아 있을 뿐 아무것도 못하는데 그래도 이 자리를 채우고 있어야 하는 출근이라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이날 하루 쉬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추가로 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일을 하지 않겠다는 심보가 아닌데, 어째서 나를 믿어 주지 않는지, 어째서 나는 '쉬고만' 싶어한다고 믿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이 곳에서 나는 나를 처음으로 믿어주는 상사를 만났고, 나는 그래서 나의 웰빙을 가장 우선시 할 수 있게 되었다. 몸이 아프면 내 몸을 우선시 한다. 중간에 요가 수업을 끼워 넣을 수 있으면 요가 수업을 끼워 넣는다. 두 시간동안 오랫만에 오피스에 출근한 팀원과 브런치를 하고 싶으면 하면서 맘껏 수다를 떤다. 놀라운 것은 나의 웰빙을 우선시 하면서 자연스레 집중력과 업무 능률이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팀과의 잡 인터뷰때 어째서 당신은 혼자서도 주체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 스트레스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나의 레질리언지 - 지속가능하게 장기적으로 버틸 수 있는 힘 - 이 얼마나 되는지를 꼬치꼬치 물어봤던 것인지 이해가 간다. 창의력을 요하는 일, 그리고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팀. 끊임없이 배움과 성장을 푸시하는 리더. 그 팀 안에서 행복하면서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나.
업무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기꺼이 나의 시간을 일과 관련한 공부를 하는 것에 신나고도 즐겁게 투자한다. 나의 비전과 나의 일의 비전, 우리의 팀의 비전, 우리의 리더의 비전, 그리고 우리 조직의 비전이 동일하면 이런 시너지가 나는거구나, 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일을 하지 말라는데도 일을 하고, 출근을 하지 말라는 데도 출근을 한다.
인간의 심리란 참으로 당연하면서도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