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영 박사님이 말해주지 않았는데도, 우리 엄마의 교육 철학은 독립이었다
초등학교 때, 비만 오면 엄마와 무지하게 싸웠다.
아침에는 비가 안오다 오후에 비가 오는 날이면, 다른 친구들은 전부 엄마가 우산을 가지고 데리러 오는 것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빠지게 엄마를 기다리지만, 모두가 떠날 때까지 우리 엄마는 오지 않고, 나는 공중전화로 뛰어가서 콜렉트콜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쓰고 보니 세상이 참 많이 변했구나 새삼 느껴진다)
몇번의 통화음과 발신자 확인을 거쳐 엄마가 전화를 받으면, 나는 '엄마! 비 와!' 라고 외쳤다. 비 온다고, 근데 우산이 없다고. 하지만 엄마는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냥 비 맞고 뛰어와' 라고 말했다. 내가 짜증을 내도 꿋꿋이, '못 가, 그냥 와' 라고 말했다. 그나마 전화를 받으면 다행이지 가끔은 전화도 안 받는다.
결국 나는 짜증이 나건 화가 나건 울음이 터지건 어쩔 수 없이 혼자 집에 갈 방도를 찾아야 했는데, 우산이 있는 친구와 같이 쓰고 집에 가거나, 아니면 결국 비 맞고 뛰어갔다. 집에 가서 엄마에게 짜증 짜증 왕짜증을 낼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집에 가서 엄마에게 짜증을 그렇게 냈음에도 엄마는 꿈쩍하지 않았다. 비를 맞고 오는 것 보다 더 서러웠던 것은 비교였다. 왜 남의 집 엄마들은 다 우산을 갖다 주는데 (나도 우산 들고 기다리는 엄마와 한 우산 쓰고 손잡고 집으로 가고 싶다!) 우리 엄마는 이렇게 냉혈한인거야? 기저에는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덜 사랑하는 건가? 나도 사랑받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다! 라는 마음이 깔려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서야, 그건 엄마의 사랑 문제가 아니라 아이 넷을 키우는 엄마의 반강제적인 결정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비가 오는 날, 아이 넷을 다 챙기려면 엄마의 몸이 세개가 아닌 이상 불가능했고, 비오는 날 몇번 꽁지에 불붙은 듯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엄마는, 그 당시 열심히 읽었던 박혜란 교수님의 육아서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박혜란 교수님의 책에는 비오는 날 우산을 갖다 주지 않으면, 결국 아이들이 알아서 스스로 방법을 찾아낸다고 나와 있었다. 우산을 항상 사물함에 두던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하던가, 가방을 둘러 쓰고 오든가. 아이가 큰 상처를 받을까봐 걱정되겠지만 결국 아이는 금세 극복하고 오히려 성장하게 된다고.
그리고 박혜란 교수님의 말이 맞았다. 우산을 갖다주는 엄마가 없었던 나는, 애정결핍이 있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았다. 대신 이 세상에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도 그게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도와주는 엄마가 없어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비 좀 맞고 온다고 그게 그렇게 큰 일은 아니라는 걸 진작부터 배운 사람이 되었다.
물론 엄마의 마음이야 일일히 우산을 들고 하교 시키러 가고 싶지만, 한명만 챙기면 나머지 아이들에게 불공평하고, 공평하게 전부 다 챙기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대체 언제까지? 애 넷을 대체 언제까지 일일히 챙겨줘야 하는가. 거기에서 엄마의 독립 교육은 시작되었다. 엄마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엄마도 모르겠다고 한다. 만약 자식이 넷이 아니라 하나나 둘이었다면 과연 일찍부터 '자식의 독립'을 모토로 삼았을까, 라고. 둘까지는 죽을 때까지 내가 케어할 수 있다고 양 옆에 자식을 끼고 돌았을려나. 하지만 자식이 넷이었기에, 그것은 불가능했고 엄마는 대신 독립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그것은 4남매 육아에 지친 엄마의 목표이기도 했다. 자녀들로부터의 독립. 나도 언젠간 너희의 엄마가 아닌, 자유로운 나로서 살고 싶다는 목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부모님으로부터 '대학까지가 우리 지원의 끝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엄마 아빠가 너희를 키울 의무는 미성년까지라고 했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너희는 집 나가서 알아서 살아야 하는데, 요즘 세상이 대학교까지는 보내주는 추세니 어떻게 해서든 대학교까지는 보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하면 지원은 끝이라고. 그때부터는 너희가 살 곳, 먹을 것, 입을 것은 "알아서" 해야 한다고 했다. 좀 차갑고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 세뇌(?)덕분에 우리는 당연하게 부모님과 함께 산다거나, 백수로 얹혀 산다는 생각을 감히 해본 적도 없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꽤 달콤한 제안이기도 했다. 그 말은 동시에 독립하면 부모님의 간섭 없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나는 사춘기를 나름 심하게 겪으면서 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학교를 가며,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삐딱선을 탔는데, 자칫하면 '반항'의 길로 나갈 내가 학교에 머무르며 공부했던 이유는 엄마의 변함없는, 그놈의 "독립" 타령 이었다. 나 뿐 아니라 동생들도 마찬가지.
'공부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된다. 부모로서의 의무로 고등학교 까지는 보낼거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그때는 너희 맘대로 살아. 대신 그 때부터 뭐해서 먹고 살 건지는 지금부터 생각해. 그 때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살아야 하니까. 만화 그려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면 만화를 그리고, 음식점을 하고 싶으면 요리를 배워라. 장사를 하고 싶으면 아이템을 생각해봐. 공부를 하면 너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좀 더 넓어지니까 공부를 하라는 거지 만약 이미 너희가 뭘 해서 먹고 살지 명확히 정해졌으면 그게 제일 중요한거야.'
우리 부모님은 공부가 아니더라도 정말로 우리의 꿈을 지원해 주셨을 텐데, 안타깝게도 온실속의 화초처럼 자란 우리는, 네 명 중 아무도 공부 말고 뭔가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그런 의미에서 엄마를 실망시켰다)
심지어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직접 벌어보라고 엄마가 했는데도 아무도 감히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서지도 못했다. 그만큼 우리는 여린(?) 아이들이었고, 그런 여린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얌전히 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공부를 해서 대학교에 가면, 뭔가 돈을 벌어서 혼자 살 수 있는 직업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라고 막연히 생각한 것이다.
어쨌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끝'이라는 말을 그렇게 주입시킨 덕에,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학창시절이 끝나면 집은 당연히 떠나는 것 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대학교도 집 근처가 아닌, 집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것인 줄 알았다. 믿는대로 이뤄지듯, 우리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집과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입학했고 자연스레 기숙사-자취로 이어지는 독립군의 여정을 시작했다.
독립하고 나서도 나는 가끔씩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엄마, 내 친구네 엄마들은 심지어 찌개를 냄비에 끓여서 고속버스에 태워서 보냈대. 내 친구가 터미널 가서 솥 들고 왔대.' 그러면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나는 네명한테 그렇게 못해. 대신 내가 집에서 찌개 끓여서 네 몫까지 맛있게 먹어줄게(?). 엄마 찌개가 먹고싶으면 집에 와. 엄마 반찬이 먹고 싶으면 직접 집에 와서 니가 가져가. 집에서 찌개와 반찬 준비까지는 너를 사랑하는 만큼 가득가득 해 놓을 수 있어. 레시피도 가르쳐 줄게. 니가 직접 해먹어 그럼 되지!'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레 우리는 형제자매 가릴 것 없이 모두 엄마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살림 고수(고수 까지는 아니고 중수)가 되었고 각자 라이프스타일을 찾아 잘 살고 있다. 우리는 가끔씩 만약 부모님이 지방이 아니라 수도권에 있었더라면 빠른 독립이 가능했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하지만 엄마의 성향상 서울이든 수도권이든 내보냈을 것 같다. 엄마는 주변 사람들이 다 말릴 때, 첫째 딸을 15살에 혼자 미국으로 일년간 보낸 사람이다. (물론 내가 간다고 했다) 서울도 아니고,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지방 고등학교에서 그 일은 센세이션이었다. 자식의 '독립'을 웬만큼 중시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점점 육아를 하던 엄마의 나이에 가까워 질수록, 자녀를 '독립시키는 것',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 '걱정되어 보호하는 것'과 '완벽하게 해 주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녀를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
내 눈앞에 있으면 적어도 걱정은 덜 되는데, 눈앞에 없으면 대체 어디서 뭘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불안하고 걱정스럽다.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없어도, 이 아이는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자식에 대한 믿음.
아이가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만큼, 이때껏 최선을 다해 키웠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나는 엄마가 나를 믿어준 만큼, 나의 자식을 믿어줄 수 있을까.
자식 넷 모두 십대를 지나자마자 서울로 상경시키면서, 엄마는 어떻게 걱정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는 넷 중 셋을 멀리 해외로 보내놓고, 엄마는 어떻게 불안하지 않냐고 물었다.
엄마의 대답.
'걱정되지. 항상 기도하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키우고 나면 너희는 너희고, 우리는 우리인걸.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야지. 나는 완벽하지는 못할지언정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그리고 나머지는 너희가 알아서 하는거지. 너희가 선택하고, 너희가 책임지고. 너희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나는 나의 일처럼 속상해하겠지만 그걸로 끝이다.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건 없어.'
한편으로 생각하면 '독립'은 강제로 시킬 수 없다.
'독립'하겠다는 자식은, 혼자서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이다. 그 자신감은 내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부모님의 무한한 지지를 든든히 뒤에 업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평범한 상황에서 부모님에게 의존하지 않지만, 대신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마주쳤을 때, 우리 엄마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최대한 함께 위기를 헤쳐나갈 방법을 강구해 줄 것임을 믿는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그 믿음은 내가 과감하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엄마는 언제나 우리를 '독립시켜야 할, 독립적인 존재'로 생각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고 그 결정을 최대한 존중해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치열한 토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명 모두, 다 큰 어른이 되도록 엄마와 친하고, 대화를 많이 나누고, 엄마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용기가 있는 것은 과연 박혜란 교수님이 말한대로 "믿는 만큼 자라서" 인 것 같다.
엄마의 존중과 믿음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독립한 우리 네명은 엄마가 바라던 대로, 왠만한 문제로는 스트레스도 덜 받으며, 알아서 방법을 찾아 해결한다. 한국이든 해외든 적응도 잘한다. 집도 알아서 구하고, 이사도 알아서 하고, 재태크도 알아서 한다. 원하는 대로 옷을 입고, 하고 싶은걸 하고, 피어싱을 하고, 타투도 한다.
심지어 유학을 떠나는데 공항도 알아서 간다! 이건 특히 내가 이리저리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출입국을 반복하다 보니 생긴 현상인데 우리 가족은 공항에 가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막내가 일년만에 입국하는데 알아서 공항에서 택시타고 이모집으로 가라고 한다. 허허허.
사실 부모님 집이 지방에 있으니 교통이 불편해서 그렇다.
부모님이 공항에 오는 대신,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는 대신, 우리 넷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서로 시간을 빼서 공항으로 배웅가고, 마중가고, 서로 이사를 돕고 서로 의논한다.
이것도 엄마의 큰 그림인가.
언젠가는 먼저 떠날 부모 대신, 형제 자매끼리 우애있게 지내며 의지하고 살라고.
독립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기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