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기억
신혼 첫 집은 신축빌라였다. 나와 남편, 우린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난생처음 발을 디뎌 본 지역에서 없는 신혼살림을 차렸다. 부동산에서 인터넷에 올려놓은 사진으로 내가 집을 고르고 남편이 직접 계약을 했다. 더위를 잘 타는 남편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혼자 그 집을 쓸고 닦았다. 우리는 미련하게 입주청소라는 걸 맡길 생각도 못했다.
처음 터미널에 내려 택시에 올라타 소리 내어 발음하는 것조차 낯선 동네 이름을 말하고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나의 신혼 첮 집으로 가는 몇 분의 긴장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여기가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이구나. 창밖으로 푸른 나무들이 참 많이 스쳤다. 여름보다 가을이 더 가깝게 느껴졌던 날이었다.
신혼 첫 집은 새로 올린 건물이라 깨끗했지만 해가 들어오지 않았고 언제부턴가 비가 오면 창틀 사이였는지 벽 틈새였는지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비가 새어 들어와 벽지를 타고 내렸고 장판 모퉁이 부분은 축축해졌다. 거의 습했거나 더웠고 추웠다. 나는 그럼에도 창문을 열고 빗물을 닦아냈고 옷을 더 껴입었다. 코가 시렸고 발이 시렸고 글을 쓸 땐 손이 시렸는데 보일러를 켜야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옷을 더 껴입고 손을 주물렀다.
가까이 사는 사람도 없고 놀러 오는 이도 없었는데 나는 매일 쉬지 않고 늘 부지런히 쓸고 닦았다. 내 없는 첫 살림들이었으니까.
누구에게나 아픈 말들, 잊히지 않는 기가 막힌 말들이 몇몇 개 있겠지만 "이런 집은 오천 정도 하냐"라는 악의 없었지만 관심도 없이 던지는 질문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양치를 하다가도 서러웠고 빗물을 닦아내다가도 화가 났다. 그 집은 오천의 두배를 주고도 몇천을 더 줘야 얻을 수 있던, 딱 오천만 원 정도로 보였던 전셋집이었다.
남편 월급이 나오는 날 은행에 대출 이자를 내고 남은 돈은 통장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남편이 성과급이 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그걸로 뭘 할까 하고 싶은 것 하고 사고 싶은 것 사고 가고 싶은 곳 가자 그러다가도 어김없이 통장에 차곡차곡 넣어뒀다. 그땐 그저 그럼에도 그럴 수가 있었다.
우리는 가난한 신혼부부였지만 가난하지 않았고
없는 살림이었지만 궁핍하지 않았다.
남편의 월급날엔 치킨을 시켜먹었고 읽고 싶은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 그리고 가끔 지하철을 타고 예술의 전당으로 샤롯데 씨어터로 공연을 보러 갔다. 매달 여행을 위해 따로 빼놓았던 몫으로 제주도, 강원도 그리고 가까운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벚나무가 많던 길을 봄밤엔 손잡고 걸었고 주말엔 늦잠을 자고 일어나 내 용돈 혹은 남편의 용돈으로 커피 한 잔 마시러 다녀오기도 했다.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남편에게 나중에 우리가 사는 집은 화장실에 욕조가 있으면 좋겠어, 부엌은 디귿자면 좋겠다고 말해서였을까. 남편은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엎드려 누워 주변 아파트 도면을 검색하며 혜혜, 여긴 욕실이 좁다. 혜혜, 여긴 부엌이 일자야. 그랬다.
그 집들은 무엇도 우리가 원하는 조건에 맞지 않았지만 그보다도 우리가 값을 지불하고 살 수 없는 집이었다. 우리가 원했던 조건을 빼고 아파트일 것, 깨끗할 것, 이 두 가지만 보고 찾은 우리의 두 번째 집은 나보다 두 살 덜 먹은 지어진지 30년이 훌쩍 된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