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 안 놀아요

커리어를 멈추고 시작된 일들

by 클로드
니 이제 놀재?


휴직에 들어간 어느 날, 시어머님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놀재? 노냐고? 논다니...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논단 말이지? 내 하루를 옆에서 보신다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실까? 욱하는 억울함이 들었다. 하지만 훗날 알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출근이 아닌 나머지는 '논다'는 단어로 말씀하신다는 걸.


그래서 만약 다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데미지를 입지 않을 자신이 있다. 심지어 여유만만하게,

"어머니, 제가 놀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얼마나 바쁘게 보내고 있는데요."

하고 여우스럽게 말할 자신이.




휴직을 조각조각 여러 차례 해보았지만 놀기 위해, 일을 쉬기 위해 휴직을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육아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였고, 남편의 학업과 사업 집중을 위한 나의 메꿈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희생의 아이콘으로 만들 생각은 없다. 그보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기회 포착자에 가깝다. 휴직이 필요한 상황에 흔쾌히 휴직을 선택했고, 심지어 계획했으니까. 이 휴직을 무엇으로 채울지.




3년 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쓴 휴직은 육아 시작 후 내게 주어진 첫 자유시간이었다. 그전에 짬짬이 해내던 자기 계발 활동을 더 활짝 펴내며 그 시간을 보냈다. SK 텔레콤에서 운영하는 메타버스 밋업을 수개월 진행했고, 글쓰기 관련된 여러 공모전에 도전했다. 그 결과 한 문단에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고, 월간지 <좋은 생각>에 글이 실리기도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휴직 전부터 새벽기상으로 내 시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에 강의를 듣고 스피치를 배웠다.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클로드라는 부캐를 만들어 인스타그램은 물론 블로그, 브런치, 유튜브 등 SNS에 성장 기록을 남겼다. 이걸 더 잘 해내고 싶어서 브랜딩 공부도 했다.


그 시간이 내공이 되어 휴직 후에는 상대적으로 늘어난 시간 속에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만약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갑자기 시간만 늘어났다면 무얼 할지 우왕좌왕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응축된 폭죽처럼, 꽃잎을 잔뜩 숨겨놓은 꽃봉오리처럼 하고 싶은 일들이 꽁꽁 뭉쳐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휴직 후 해낸 일들은 갑자기 시작된 일이 아닌, 언젠가 해보려고 마음에 꼭꼭 담아두던 일들이 꽃망울 터지듯 벌어진 일들이다.


3개월이었으니, 딱 봄만큼의 휴직이었다. 복직 후 이중 많은 것들은 놓거나 축소시켰다. 하지만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글을 썼고, 브랜딩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생각지 못하게 회사원으로서의 나를 성장시켰다. 말이 늘었고, 글이 늘었다. 그러다 보니 프레젠테이션이 늘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업무가 제품 스토리와 맞닿게 할 브랜딩력도 늘었다. 보다 열린 사람이 된 나는 회사일의 많은 부분에서 활력이 붙었다.




지금 쓰고 있는 6개월의 휴직 기간에는 출간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휴직 전부터 에세이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사 다닐 때는 아무래도 작업에 긴 시간을 할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휴직으로 커다란 시간이 생기니 출판사 계약부터 원고 퇴고, 그리고 출판사와의 교정 작업에 몰입하며 훨씬 밀도 있게 진행하고 있다. 홍보를 위한 브랜딩 역시 미리미리 챙겨가면서 말이다.


온, 오프라인으로 여러 북클럽에 참여하며 읽고 토론하는 시간도 갖고 있다. 북클럽은 몇 년 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경험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회사에서 운영하는 사내 북클럽 리더 모집에 선정되어 8개월 간 내가 기획한 북클럽을 이끌어가보기도 했다. 북클럽 멤버와 리더를 모두 경험해 보니 이후 북클럽을 대하는 시야가 넓어졌고, 디테일을 보는 깊이가 생겼다. 휴직한 지금은 좋아하는 북클럽에 마음껏 참여하고 있다. 책과 토론을 향유하고 때론 공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리고 커뮤니티의 운영진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애정을 갖고 참여하던 온라인 글쓰기 모임에 운영진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커뮤니티의 멤버로만 지내다가 운영자가 되어보니 같은 곳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내 한 몸 열심히 참여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멤버들이 어렵지 않게 참여하도록 안내하고, 또 꾸준히 해낼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좋은 분들이 이 모임을 더 많이 찾으실 수 있도록 홍보도 해야 하고, 참여자분들께 공유할 좋은 콘텐츠를 찾는 일 역시 필요하다. 재미와 성장에 더불어 책임감과 지속력을 배우고 있다.




15년 차 연구직 회사원. 휴직과 동시에 내 커리어는 잠시 멈췄다. 휴직이 여러 차례였으니 멈춤 역시 그만큼 많았다. 하지만 그 시간 속 나는 새롭게 움직였다. 새로운 영역으로 내 반경을 넓혔고, 새로운 이력을 쌓아가고 있다. 멈춘 것은 직장인으로서의 커리어일 뿐, 내가 멈춘 게 아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좋아하는 일들' 덕분이었다.


어머니, 저는 놀고 있는 게 아니랍니다.

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