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단朝丹

by 윤인선


내가 살아온 날들이 이순을 넘기고도 벌써 몇 년이다, 그동안 수 없는 아침이 나와 함께 했다. 운이 좋은 아침은 이른 시간부터 나와 함께 했을 것이고, 운이 없는 아침은 나의 자는 모습만 보다가 쓸쓸히 돌아서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심한 야행성이라 똘망한 눈과 명쾌한 머리로 아침을 맞은 적이 별로 없다. 결혼 전에는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정오가 다 되어서야 부스스 잠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때가 많았다. 다행히 아침 일찍 출근하는 직장이 아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결혼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아침을 맞이하기 시작했지만 머리는 안갯속을 헤매면서 몸만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눈 뜨자마자 눈곱도 안 떼고 커피를 한잔 마셔야 머리가 맑아진다.

그런 내가 몸도 마음도 머리도 멀쩡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산이었다. 결혼 전부터 산에 오르기를 책을 읽거나 글을 끼적이는 것만큼이나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내게 산에서 맞는 아침은 즐거움 중의 즐거움이었다.

여러 산에서 아침을 맞이하였지만 그중의 으뜸은 설악산과 오대산의 아침이었다.

설악산은 2박 3일의 일정이어서 좀 빠듯했다. 친구와 저녁에 서울을 출발하여 밤늦게 속초에 도착하여 1박을 했다. 다음날 새벽 6시에 설악동으로 가서 바로 산행을 시작했다. 좀 무리였지만 대청봉을 지나 백담사 쪽으로 내려가는 코스를 잡았다. 원래는 수렴동 산장에서 묵을 계획이었는데 등산객들이 너무 많아 백담 산장까지 가기로 했다. 수렴동 산장을 출발하고 얼마 안 되어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어두워졌다. 산에서는 해가 진다 싶으면 바로 어둠이었다. 이미 11시간의 산행 끝이어서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백담 산장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두움과 무서움을 이기려고 머리에는 헤드랜턴을 하고 손에는 손전등을 들고 친구와 노래를 부르며 2시간을 뛰다시피 걸어 백담 산장에 도착했다. 이미 저녁식사를 마친 등산객들은 술을 한 잔씩 걸쳤는지 여기저기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도 서둘러 저녁을 먹고 친구의 휴대품이던 뚜껑 위에 뚜껑만 한 잔을 모자처럼 쓰고 있던 손바닥만 한 캡틴큐를 한 잔씩 마시고 눈을 붙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등산객들이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아침을 먹으려고 침낭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산에서는 안개 없는 아침을 만나기 쉽지 않은데 그날은 안개가 전혀 없는 온전한 아침이었다. 모든 자연이 너무 뚜렷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새색시가 이른 아침 세수한 후의 말갛고 뽀송뽀송한 얼굴로 새신랑에게 인사하듯 그렇게 그날의 아침이 내게 그랬다. 친구와 나는 아침 식사를 할 생각도 없이 앉아 있었다. 아침 식사 준비 시간을 놓친 우리는 커피 한잔과 빵 한쪽으로 대신하고 새색시 얼굴 같은 아침과의 아쉬운 이별을 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아침 풍경이었다.

오대산에서도 설악산과 마찬가지로 2박 3일 계획이었다. 그런데 도로 정체가 너무 심하여 새벽 2시에 월정사 아래에 있는 동네에 도착하는 바람에 정확히 2박 3일은 아니고 1박 3일이 되었다. 새벽 2시에 우리를 내려놓은 버스는 꽁무니를 흔들며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캄캄한 시간, 낯선 동네에 짐짝처럼 내려진 우리는 출출한 배를 대충 채우고 산행을 시작했다. 어둠 속을, 그것도 가장 어둠이 깊다는 새벽 두세 시에 산속을 걷는다는 것이 만만치 않았지만 그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걷기 시작하여 아침을 지나, 점심을 보내고, 저녁 무렵에 진고개를 사이에 두고 산을 두 개 넘어 노인봉 산장에 도착했다. 이른 저녁이라 좀 더 걸을까 생각했지만 원래 계획이 노인봉 산장에서의 1박이었기 때문에 짐을 풀었다. 노인봉 산장에는 등산객들에게는 유명한 산장지기인 털보아저씨가 있었다. 왜 유명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정말로 얼굴의 반이 수염으로 뒤덮인 털보였다. 열대여섯 시간의 산행 후라 몸이 노곤하여 저녁을 먹자마자 캡틴큐도 마시지 못하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산이건 산장에는 많은 등산객들이 붐볐다. 남녀의 잠자리가 구분이 없어서 대충 칸을 나누어 남자와 여자들이 따로 잤다. 밤새 몸을 뒤척이는 소리와 땀 냄새, 발 냄새, 이 가는 소리, 코 고는 소리가 뒤섞여서 좀 예민한 사람들은 잠을 푹 자지 못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걸은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침낭 속에서 애벌레처럼 푹 잤다. 나도 그런 소리들 때문에 선잠 잘 때가 간혹 있었는데, 그날은 꽤 피곤했는지 세상모르게 푹 잤다. 선잠을 자건 푹 자건 산에서의 아침은 거의 거뜬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몸 상태가 좋았는지 산장지기인 털보아저씨 다음으로 일찍 일어났다. 침낭을 대충 정리하고 다른 사람들 깰까 봐 조심조심 산장 밖으로 나왔을 때, 내 눈앞에 펼쳐지던 장관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투명하다'와 '하얗다'와 '붉다'라는 단어들이 그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안개는 안개인데 붉은 안개, 거기에 투명해 보이는 붉은 안개를 입은 아침이 내 앞에 있었다. 게다가 나뭇잎마다 총명한 아이의 눈동자 같은 이슬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려 퍼질 것 같았다.

넋을 놓고 있는 내게 털보 아저씨가 다가왔다. 무얼 그리 넋을 놓고 보느냐는 물음에 ’왜 안개가 붉어요?‘라고 물었다. 경포대에서 뜨는 태양의 붉은빛이 소금강을 타고 올라와 그렇다는 털보아저씨의 대답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소금강을 내려와 경포대로 갔다.

지금도 누군가 설악산의 말끔하고 단아한 아침과 오대산의 붉은 아침 중에 굳이 선택하라고 한다면 오대산의 붉은 아침을 선택하고 싶다. 그 이후로도 혹시나 싶어 설악산과 오대산을 몇 번은 더 갔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설악산과 오대산의 아침을 만난 적은 없다. 가끔 그리울 때면 마음에서 꺼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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