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Rutherford, New Jersey
Passiac에 있는 St. Mary Hospital에서 둘째 아들을 낳았다. 우리 집에서 차로 20~30분 정도 거리의 동네 Passaic 주민 대부분은 Working Class였고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곳이었고, 하여 제법 큰 공공시설이 모여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엔 손바닥만 한, 병원이라기보단 개인 진료소라는 단어가 어울릴법한 클리닉이 두어 군데 있었을 뿐이다. 비유하자면 내가 사는 동네의 클리닉은 '파출소'였고 Passaic의 St. Mary Hopital은 경찰서인 셈이었다. '가정의'격인 동네 클리닉에서 임신이란 진단을 내린 후 나를 '경찰서'의 전문부서로 '이첩'해주었다. 화려함이란 당최 찾아볼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초라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병원이었다. 낡은 부분들을 허물고 새로이 하기보다 청소와 수리라는 방법으로 살아왔음이 분명한 외관과 내부였다.
맨해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내가 주로 병원을 찾는 시간은 초저녁인 5, 6시 정도였고 더러는 저녁 7시나 8시가 넘을 때도 있었다. 그 시간에 병원을 찾는 임산부들은 죄다 워킹맘들이었다. 저녁 시간대에 산부인과 대기실에 앉아 있는 '워킹맘 임산부'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차비했으며,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한 후 병원을 찾았다는 걸 쉬이 드러내는 얼굴과 신체였다. 멀리서 보이는 실루엣부터 다가오는 걸음걸이에서도 피로와 무거움이 손쉽게 잡혔다. 우리 모두는 1차 전투를 치른 후 참호에서 잠시의 여유를 누릴 새 없이 2차 전투에 투입된 전사집단이었다.
또한, 저녁시간에 산부인과를 찾는 임산부들 중 상당수는 아이들을 한두 명 데리고 있었다. 산모들의 배속에 있는 아기가 둘째나 셋째일 수 있다. 위킹맘인 산모들은 학교나 데이케어 센터에서 찾아 온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원에 왔다. 나도 역시 병원을 찾을 때는 대부분 큰아들과 함께였다. 대기실엔 산모들과 그들이 데리고 온 아이들이 함께 옹기 종기 모여있기 일쑤였다.
St. Mary Hospital은 자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위기감을 주지 않는다는 강렬한 특색이 있다. 중, 대형 병원들은 흔히 아픈 사람들과 그 보호자들, 의료종사자들과 수많은 기계들이 만들어내는 '아우성'이 있다. 이는 병원 입구의 주차장부터 접수실, 대기실은 물론이며 그 아우성은 응급실에서 절정을 이룬다. 내가 1989년에 10개월 동안 다녔던 St. Mary Hospital의 구석구석에는 안정이란 분위기가 아른히 배어있었다. 그 건물에서는 의사도 간호사도 소곤소곤 거렸고 환자들도 조곤조곤 거리며 대답하거나 한두 마디 질문을 던지곤 했다. 심지어 의료기구나 기계들도 조용히 작동했다.
처음 병원을 찾은 날, 의사는 풀네임을 말하며, 자신이 바로 내가 아기를 안고 병원을 나가는 날까지 보게 될 사람이라며 잘 지내보자고 유머를 얹은 인사를 건넸다. 모든 이빨을 빠짐없이 소환하여 일렬로 세운 후 우르르 드러내며 미소 짓는 의사는 인도에서 이민 온 재미교포였다. 인도인들이 이민의 바다에 뛰어들 때 챙긴 것은 짐보따리만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습득한 제2국어인 영어라는 강력한 구명조끼가 있었다.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카스트라는 신분제 또한 그들이 앞으로만 곧장 보고 진격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구구단과 같은 선 위에 있는 '인도 19단'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듯 그들에겐 놀라운 교육열도 있다. 이것들이 혼연일체를 이루어 인도 이민자들이 성공적으로 ‘남의 땅’ 에서 기회를 움켜쥐게 만들었고 또한 의대 진학률을 높였다.
출산 예정일은 11월 넷째 주 언저리였다. 미국에서 온 가족이 모이는 두 개의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이 그해는 11월 24일, 금요일이었다. 첫아이를 제왕절개 수술로 낳은 나에게 의사는 둘째의 출산에도 제왕절개 수술을 권했다. 의사와 나는 수술 날짜를 의논했다.
'나는 금요일인 추수감사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 추수감사절 다음은 주말이다, 또한 수술 후 하루 정도는 당신이 어떠한지 경과를 보고 싶다, 그러하니 추수감사절 주의 화요일이나 수요일에 당신과 당신 가족이 둘째를 만나보는 건 어떠한가? 당신 가족도 모두 함께 추수감사절을 보내게 된다. 우리 모두에겐 감사할 일이 많은 추수감사절이 될 것이다.' 주치의는 짙은 피부색과 대조되는 유난히 하얀 미소와 더불어 유머로도 평판이 좋았다.
1989년 11월 22일 수요일에 둘째 아들을 낳았다. 동네 이웃이 만들어온 흰쌀밥과 소고기반 미역반의 미역국으로 우리 식구는 추수감사절 아침밥을 먹었다. 시간에 맞추어 신생아실로 갔다. 큰아들은 동생을 본다며 종종걸음이었고, 나는 제왕 절개한 수술 자리의 눈치를 봐가며 슬깃슬깃 거렸고 남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였다. 우리 셋은 신생아실 유리창에 사이좋게 나란히 코를 박고 간호 사품에 안긴 아기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아주 기냥 ‘떡두꺼비’란 단어에 꼭 들어맞는 튼실한 아기였다. 우리 네 식구는 한자리에 모였다. 추수감사절이었고 감사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기도의 알파와 오메가는 애걸복걸이나 조건을 앞세운 협상이 아니라 바로 감사이다.
묵히고 삭힌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면 신의 손길이 나를 스쳤다고 생각되는 지점이 몇 군데 있다. 어떤 인연이나 어떤 사건들이 그러하다. 영어 단어 중 내가 매우 좋아하는 'decent'란 단어에 딱 들어맞는 곳과 사람들이 St. Mary Hospital이었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사부작사부작거리며 야무지게 해내는 의료진들이었다. 집에 갑자기 찾아온 친구에게, 여러 사정상 라면밖에 끓여줄 수 없을 때, 김치통 깊숙한 곳에서, 공기와 닿지 않아 모양과 맛을 온전히 간직한 김치 한 포기를 조심히 꺼내어,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접시에 얌전히 담아내는 마음이 내가 아는 'decent'의 뜻이다. 근원적으로 외롭고 불안한 타국살이와 임신 출산과정, 그리고 막판의 변수였던 권총강도사건 중에서 St. Mary Hospital에서 내가 받은 'decent'한 의료서비스는 분명 신의 손길이었다.
표지 사진 St. Mary Hospital Logo [출처 : 구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