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가다 만나자
집을 알아보는 동네 이름 중, '안양'이라는 포인트에 내가 충격을 받았다는 걸 눈치채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는지 아니면 직장과의 거리가 멀어서인지 아들은 그 도시 이름을 다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몇 번 이사해보진 않았지만 내가 집을 알아보는 방식과 아들이 독립할 집을 알아보는 방식은 사뭇 달랐다. 나는 이사할 동네를 콕 찍은 후 부동산을 찾아가 ‘발’로 뛰어서 집을 구했었다. 아들은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에 예산과 동네 이름들을 입력한 후 검색 카테고리에 올라온 사진을 보며 '눈'으로 찾았다. 아들은 1~2주 동안 집 안팎 사진과 옵션을 요리조리 보고 따지더니 몇 군데를 골라 전화로 약속을 잡고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그 집들을 둘러보았다.
아들이 나에게 맘에 드는 두어 집의 사진을 보여주었으나, 나는 '진심으로' 보는 둥 마는 등했다. ‘쿨'하게 아들을 독립시키기로 나는 맘먹었고 그 '쿨'함의 첫 번째 디테일은 결코 '내 의견은 보태지 않는다'였다, '돈만 보태주겠다'였다. 안양이던, 남쪽 끝 섬 이디가 되었건, 사는 집에 가지 않는다, 만약 간청하면 가볼까 말까 생각이란 걸 해보겠다. 반찬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렇게나 편리하고 맛있는 반조리, 조리 식품이 넘쳐나는 세상이니.
집밥이 먹고 싶으면 일단 참아 보고 그래도 정 안 되겠으면 사나흘 전에 연락을 먼저 한 후 집에 오라고 아들에게 일렀다. 조리법이던 뭐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엄마에게 전화하지 말고 인터넷 엄마, 유튜브 아빠에게 물어보라고 아들에게 말했다. "엄마! 좀 심하지만, 좋아요." "그래 나도 좀 시원섭섭하지만, 좋아." 우리는 파이팅 넘치게 각자도생을 외쳤다.
집에서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아들이 독립할 집이 결정되었다. 나는 동네 이름도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그저 아들 통장으로 '총알을 쏘았을' 뿐이다. 퇴근 후나 주말이면 전세 계약서, 전세 확정일자, 에어컨과 냉장고등 가전제품, 침대나 식탁등 가구를 챙기고 마련하느라 아들은 땀을 몇 바가지 쏟고 다녔지만 나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몸은 고된듯해도 독립에 대한 '내적 설렘과 기쁨'이 아들에게서 절로 뿜어져 나왔다.
아들이 이사 나가는 날이 되었다. 용달차 아저씨, 아들의 친구 두 명, 그리고 아들이 이삿짐을 옮겼다. 남편은 조금 거들었고 나는 '후환'이 두려워서 손을 보태지 않았다. 일을 앞에 두면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에너지를 남김없이 쓰고 '화르르 전사'하는 스타일인 내가, 나는 두려웠다. 이제는 내 건강이나 잘 챙기는 것이, 내 앞가림이나 잘하는 것이 주된 임무인 나이가 되고 보니 자연스레 팔과 다리의 근육을 아끼게 되었다. 게다가 얼마 안 되는 짐에 장정이 4명이나 되니...
마지막 짐이 나가고 아들이 "전화할게요."라고 남편과 나에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비장의 무기로 챙겨 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럼 애쓰고, 그동안 즐거웠어.',. 내 말에 남편도 웃고 아들도 웃고 아들 친구들도 따라 웃었다. 센스가 남다른 아들 친구가 덧붙였다, '어머니, "그동안 즐거웠어' 다음에 '오다가다 만나자'라고 하셔야지요.' 내가 얼른 받았다, '구뢔에? 그렇게 하는 거야? 그럼, “그동안 즐거웠고, 오다가다 만나자." ‘우리는 다 같이 또 웃었다. 웃으면서 가고 웃으며 보냈다는 점에서 내 비장의 무기 ‘그동안 즐거웠어’는 제 몫을 톡톡히 해 낸 셈이다.
아들이 떠났다. 남편은 늘 하던 대로 책상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빗자루를 들고 아들이 떠난 방을 쓸었다. 구석구석 걸레질을 하고 나서 괜스레 마루도, 이방 저 방도, 돌아다니며 걸레질했다. 한 일도 별로 없건만 밥 할 힘도, 있는 반찬으로 밥을 차릴 여력도 없었다. 집 앞 두부집으로 가서 늦은 점심 겸 저녁으로 남편은 청국장, 나는 순두부를 먹었다. 식당 벽의 대롱대롱 매달린 텔레비전에서는 쉴 새 없이 누군가가 떠들었다. 북한산 턱 언저리 동네인지라 주된 식당 손님들인 등산객들도 쉬지 않고 이야기하다 잠시 쉴 겸 한 숟가락 뜨곤 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나니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이삿짐을 대충 정리하고 친구들과 저녁 먹으며 한잔 하고 있다고. 아들과 간단명료한 통화를 마치고 초저녁인데도 잠자리에 들었다. 남편도 웬일인지 공부를 일치감치 접고 잠을 청했다.
끙끙 거리는 내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보니 아직 그날 밤이었다. 식은땀을 말리고 물도 한잔 마실 겸 마루로 나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아들의 방을 보았다. 누군가가 떠나고 남겨진 빈 방이 아니었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방주인인 아들이 퇴근 후에 돌아올 방이었다. out of sight, into the mind라는 문장을 나는 그때 완벽히 이해했다.
다시 잠자리에 들어 문득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보니 아들에게서 중국 촉나라의 승상 제갈공명의 출사표와 같은, 한편으론 비장하나 동시에 닭살 돋는 멘트가 잔뜩 발린 톡이 와있었다. 제갈량이 후주 유선에게 올린 이 상소문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했던가? 나도 평소와는 딴판으로 무척이나 감상적인 답을 보내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젯밤 아들과 나눈 톡을 보니, 아, 밤에 쓴 편지는 부치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 쩝.
표지 사진 : 아들이 보내준 자기 집 사진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