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클라우디아 Feb 21. 2021

그동안 즐거웠어 5

윗집 할머니





대학원을 마친 아들이 취업과 유학의 기로에서 취업으로 방향을 잡아 직장에 안착하기까지의 시간은 짧으면서 길었다.





침대는 자는 곳이지 삐그적대며 눈 뜨고 누워있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의 남편은 실제로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아침에 눈을 뜨는 동시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씻고 밥을 먹는 아빠, 숟가락을 놓는 동시에 식탁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직장으로 향하는 아빠를, 아들은 보며 자랐다. 취업준비에 돌입한 아들은 선배의 소개로 여의도의 어느 연구소에 방을 얻었다. 아들은 연구소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대신 공짜로 연구실을 썼다. 침대와 식탁을 박차고 나아가는 아빠와 근심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온몸으로 드러내는 엄마로부터 벗어나 숨 쉴 공간을, 아들은 그렇게 마련했다.





취준생이 된 아들은 정릉 골짜기의 우리 동네에서 여의도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 버스는 정릉천을 따라 내리막길을 비틀비틀 내려가면서 승객들을 한 움큼씩 주워 모은 다음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어서, 삼선교, 혜화, 창덕궁, 안국동을 지나, 명동과 서울역을 거쳐가며 한숨을 쉬듯 승객들을 토해낸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용산을 길게 가로질러, 여의도에 입성한다. 전철을 타면 빠를 텐데 왜 그 버스를 타냐고 내가 물어보았다. ‘시간이 많이 걸려서요.'라고 아들이 대답했다. 내 가슴 한쪽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취업 준비 중'인 아들에게 남편과 나는 격려와 믿음의 시선을 보낸다고 보냈지만, 아들이 받은 것의 대부분은 눈치와 부담이라는 것을 우리 셋다 말은 안 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들의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상태가 계속되리라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었다. 뉴스에서 취업이라는 두 단어가 나오기만 하면 내 온몸의 촉수가 올올히 고개를 쳐들었다. 아들의 밥이라도 잘 챙기자 작심하고 준비했지만 아들은 저녁밥 때가 훨씬 지난 후 들어와선 푹 꺼진 배에 훅! 하고 힘을 주며 메마른 입술로 '먹었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피곤할 텐데 어서 씻고 쉬라고 말하는 내 가슴 한쪽이 또 무너져 흘러내렸다. 아침이라도 좋아하는 것을 먹이고 싶어서 아들이 좋아하는 플레인 베이글을 굽고 또 구웠다. 베이글에 발라먹는 크림치즈도 더 좋은 것, 더더 좋은 것으로 먹이고자 주저 없이 집에서 먼 대형마트를 찾았다.





플레인 베이글




속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으며 손아귀에 확실히 움켜쥐기 전까지는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않는 아들은 당연히 취업준비과정을 남편이나 나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들은 아침이면 느릿하고 우아한 걸음으로 집을 나가서 해가 지면 여러 거리의 먼지를 신발에 묻힌 체로 느릿하고 찬찬히 집으로 돌아왔다. 선비같이 조용한 아들의 몸짓 안에 있는 분주한 계획을 나는 묻지 않았고, 그가 조급하고 불안에 떠는 손으로 두드렸을 직장의 문은 어디에 있으며 몇 개 인지도 나는 궁금해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은 그 누구보다도 바로 본인이 제일 급하고, 가장 절실하며, 제대로 안다는 것을 남편과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들이 취업준비를 시작한 지 두어 달이 흐른 어느 날 아침, 마당으로 빨래를 널러 나가려는데 마침 방문을 열고 나오는 아들과 마주쳤다. 밥 차려줄게라고 내가 말하자, 아니라고 엄마랑 같이 빨래 널고 먹겠다고 아들이 답했다. 그 순간부터 들끓었다 내 속이. 회사를 경영하고 국가를 경영해도 모자랄 내 아들이 빨래를 널겠다니 이게 무슨....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모처럼 쉬는 날 엄마랑 같이 빨래 너는 것과 '취업을 못한 아들이' 빨래를 너는 엄마를 돕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직장인 아들의 옷은 '휴일에 입는 편안한 옷차림'이고 '취준생'인 아들은 '후줄근한' 옷을 입는 것이 된다. 똑같은 옷이라도 바로 그러하다.





집옆 마당





괜찮다고, 너 밥 차려 주고 나서 빨래를 널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빨래 보따리를 든 아들은 벌써 현관문을 밀고 나섰다. 들끓는 속을 달래며 아들이 건네는 빨래를 하나씩 줄에 널었다. 빨래를 왜 터냐고 아들이 물었다. 수건은 이렇게 저렇게 획획 털어서 널어야 주름도 펴지고 마르고 나면 부드럽다고 답하면서 나는 속으로 통곡했다. 보기에도 아까운 내 아들이 왜 이 시간에, 왜 여기서 수건을 털어 너는 이유 따위를 배우고 있는지. 아들은 싱긋이 웃으며 휘익 휘익 속 시원하게 수건을 털어서 내게 건넸다.  그럭저럭 위태롭지만 잘 넘어갈듯한 시간이 흐르는데 갑자기 윗집 할머니가 담장 너머로 쑤욱 얼굴을 내밀었다.





집옆 마당





윗집 할머니의 시선을 읽는 순간 나는 팥죽처럼 들끓는 내 맘 다스리기를 포기했다. 허우대가 멀쩡한, 아니 멀쩡하기만 한가, 뼈대도 좋고, 키도 좋고, 다리는 또 얼마나 긴지, 운동을 안 하고도 태어나길 완벽한 애플힙이잖아, 인물은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코도 이쁘고 통통한 입술은 더할 나위 없이 이쁘고, 혈색도 좋고, 눈은 말할 것도 없이 이쁜 내 아들, 예전 남편의 친구분이 아들의 눈을 보며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눈'이라고 찬양했던 바로 그 이쁜 눈의 내 아들. (미국의 유명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이 하신 말씀이니 얼마나 권위 있고 객관적인 평가인가!), 그 아들을 윗집 할머니가 어떤 눈으로 보는지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허우대가 멀쩡한 젊은 놈이, 생선 가운데 도막처럼 튼실한 젊은 놈이 어디 할 일이 없어서, 해 뜬 지가 언제인데, 두 눈에 덕지덕지 눈곱을 고드름처럼 매달고선, 늘어진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엄마에게 빨갛고 노란 빨래집게나 건네주고 있다니, 쯧쯧쯧.'  





할머니, 아 정말 할머니, 그런 눈으로 우리 아들 보지 마세요.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우리 아들 열심히, 발가락 사이에 땀이 홍건 하도록 취업준비 중이라고요, 곧 대단한 회사에서 우리 아들에게 어서 오라고 합격통지서 보낼 거라고요, 할머니 들어는 보셨지요? 잘 키운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라 나라의 아들이라는 말, 내 아들이 바로 그런 아들이거든요, 앞으로 대단한 일을 하게 될 인재라고요. 물어보지 않고 쳐다보기만 하는 할머니에게 아들의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고 내 속이 천 번 만 번 뒤집혔다. 할머니는 장독 뚜껑을 닦으며 힐긋힐긋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얼굴을 돌리지 않고도 우리를 보는 할머니 눈동자의 흰자위가 다 보였다. 황급히 빨래를 아무렇게나 턱턱 줄에 걸치고 병아리를 모는 어미닭처럼 아들을 앞세워 집으로 들어왔다.




아들은 샤워를 하고 나는 밥을 차렸다. 아들이 느릿하고 점잖은 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마구 울었다. 나쁜 할머니, 우리 동네 빅마우스 할머니,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안 끼이는 데가 없는 할머니, 그런 시선으로 내 아들을 쳐다보았던 할머니가 싫어서, 맞아 그래서, 아침에 내가 빨래 널 때마다 그 장독대에 서서 자꾸 나에게 말을 거는 그 할머니가 싫어서, 그래서 울었다.





집옆 마당





아무도 모르게 그 할머니를 미워했다, 하늘과 땅은 눈치챘으려나. 손자를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면 어김없이 장독대로 나오는 할머니를 피해서 더더 이른 아침에 빨래를 널었다. 이리저리 피하다가 한 번씩 마주치면 할머니는 어김없이 나에게 ‘아들은 아직도?’라고 물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흘렀다. 할머니를 피하고 미워하는 내 마음이 굳어져 가던 어느 날 늦은 오후,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취직됐어요.' 힝 할머니 그동안 죄송했어요. 그냥 그랬어요 제맘이. ‘아직도?’라고 자꾸자꾸 물어보셔서 그랬어요, 엄마라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표지 사진 : 구글 이미지]

















매거진의 이전글 그동안 즐거웠어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