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식이와 삼순이는
인덕션이 첫 번째 계기였다.
보통은 하루에 삼시 세끼, ‘돌밥(돌아서면 밥차리기) 담당인 내가 주방의 '불'앞에 서있는 시간은 제법 길다. 나이가 들면 나쁜 유전자의 힘이 강해진다더니 유달리 냄새에 민감한 내 코에 가스레인지의 가스냄새가 점점 버거워졌다. 예전보다 음식을 더 많이 하는 것도 아닌데 특히 가스레인지를 켜고 끌 때의 가스냄새에 고개가 절로 돌아가곤 했다. 전을 부치거나 볶음 요리같이 불 앞에 서있는 시간이 길 때면 마스크를 쓰기도 했다. '불 앞에서 마스크'라는 이중고로 얼굴에 땀이 고여도 가스 냄새보다는 덜 고통스러웠다. 이번 이사에서 인덕션 구매에 시간과 공을 가장 많이 들였다. 그런데...
인덕션으로 만든 음식 맛이 내가 익히 아는 그 맛이 아니었다. 탱글탱글한 오징어가 양념을 온몸에 두르고 불맛을 풀풀 풍겨야 제맛인데 인덕션 불위에서 오징어 볶음을 목적으로 만들었더니 결과물은 오징어 곤죽이었다. 같은 재료를 갖고 같은 사람이 만들건만 이제껏 가스레인지 불로 이끌어 냈던 평균값에 못 미치는 음식 맛에 당황했다. 이런저런 음식 만들어서 기댓값이 충족되면 안도했다가 또다시 실패하면 지치기를 반복하니 불 앞에서 잠시 떠나자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원인은 내 저혈압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주방에 가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윈도 시트에 다시 누웠다. 몇 분 후 잠 기운이 가신 듯하여 몸을 일으키는데 머리가 핑그르르 돌며 몸이 덩달아 같이 돌아 주방 바닥으로 자빠졌다. 넘어지며 얼떨결에 바닥을 짚은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약지 사이가 찢어졌다. 왼손 엄지가 뒤로 완전히 꺾였다. 병원에 가서 찢어진 곳을 꿰맸어야 하는데 무서워서 버텼다. 뾰족한 쇠바늘이 내 생살을 꿰뚫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져서 연고와 약으로 버텼다. 찢어진 곳이 아무는 데는 오래도 걸렸다. 아물었나 싶으면 다시 터져 피가 흐르고 아물었나 싶으면 다시 터져 고름이 배어 나왔다. 이런 양손으로 도구를 잡고 음식을 하여 제대로 된 끼니를 차리기가 어려워졌다.
내 육체와 정신의 사정은 이러한데 집 밖의 코로나 확진자수는 계속 증가했고 이에 따라 남편의 재택 근무일이 늘었다. 코에 바람도 좀 넣고 내 두 손으로 음식을 만들지 않아도 되는 하루나 이틀 동안의 짧은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격렬히 비행기가 타고 싶고 더 격렬히 면세점 공기가 맡고 싶어서, 제주도행 비행기를 예약하기도 했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라고, 밖에 나가서 코로나바이러스를 내뿜지도 말고 들이마시지도 마시라는 정부의 읍소에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약들을 전부 취소했다. 전체 지구인의 사지를 묶고 목을 조르는 코로나가 종식될 수만 있다면 잘 때도 마스크를 쓰라고 해도, 그 무서운 주사를 20방, 30방 맞으라고 해도 기꺼이 따를 의향이 있기에 정부의 권유대로 바깥으로 나다니는 일을 접으니 '남편과 둘이, 집에서 하루 24시간, 삼시 세 끼'가 남았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남편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삼순님 : 저기 그러니까, 저번에 뉴스 보니까 나이가 들수록 몸은 많이 움직이고 먹는 건 줄여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네요. ( 크아 도입부 쩐다, 나 혹시 대화술 천재?)
삼식님 : 구뢔요? 나이 들면 소화기능이 점점 떨어진다더니 그래서 그런가요? 나도 저녁에 많이 먹으면 그다음 날 아침에 배가 더부룩하긴 해요.
삼순님 : (오호, 삼식님 끌어당기는 대로 잘 끌려오시네, 후후 시작이 좋아) : 저번에 어떤 이태리 할머니 백 몇 세 인가 그런 장수 할머니 뉴스 나왔는데 엄청 소식가예요, 어휴 우리 먹는 양에 비하면 어휴, 우린 넘 많이 먹어요.
삼순님 : (당기는 김에 확 당겨야지) 그러니까 나이 들면, 먹고 마시는 양은 예전과 똑같은데, 이빨이, 그 씹는 능력이 떨어지고 근육덩어리인 위도 소화능력이 자꾸 떨어진데요, 그래서 소식하라는데요. 식도 근육도 약해져서, 그래서 나이 들면 사래가 잘 걸린다네요, 얼마 전에 뉴스에서 어떤 전문의가 그랬어요. ( 크아, 뉴스에 전문가에, 권위 있는 출처를 인용하는 내 설득력, 정말 쩐다 쩔어)
삼식님 : 나도 재택근무할 때면 움직이는 시간이 많이 줄어 드는데, 그럼 이참에 우리도 먹는 것 좀 줄여도 좋겠어요.
삼순님 : (ㅋㅋㅋㅋ 삼식님 나한테 감겼네 감겼어) 양을 줄이는 것도 좋지만 하루 세끼를 두 끼로 하는 건요? 대신 저녁은 우리 좀 맛있는 거로 자알 먹어요. (뽀인트인 "맛있는 것"과 '우리'를 말할 때 나긋한 목소리로)
삼식님 : 그, 그, 그럴까요 그럼? 근데 아침에 배고프진 않겠지요? (삼식님은 지금 나에게 감기는 중이니까 약간 어질어질한 상태임)
삼순님 : 어휴 첨엔 당연히 배고프겠지요 태어나서 이제까지 하루 삼시 세 끼였는데. 두 끼가 익숙해질 때까지 참아봐야지요. 일단 두 끼 해보고 넘 배고파서 안 되겠다 싶으면 언제든 다시 세끼로 하면 되지요. 참참참, 대신 아침 겸 점심을 11시? 11시 반쯤 일찍 먹어요 우리. 아침에 넘 배고프면 바나나 한 개? 반개 정도, 반숙 계란 한 개 정도 먹어도 되구요, 그 이태리 할머니도 하루에 바나나 반개씩 꼭 드셨다네요.
삼식님 : 그 그, 그런데 출근할 땐요? 빈속으로? (나에게 완전히 감기기 전 삼식님의 마지막 몸부림)
삼순님 : 어휴 버스에 전철에 출퇴근하려면 얼마나 힘든데 출근하는 날은 당연히 이제까지처럼 아침 먹어야지요. 어휴 당신은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왜, 호호호호.
삼식님 : 그, 그렇죠 출근하는 날엔 아침을 먹어야지요. 날도 더운데 삼시세끼 차리느라 당신 힘들어서 좀 그랬는데. 삼식이인 나도 사실 그동안 맘이 좀 많이 그랬어요. 나도 하루에 두 끼면 어떨까 늘 생각했었어요, 좋아요. (크아 삼식님의 정신승리! 브라보다 정말)
자신을 몹시도 사랑하고, 그렇기에 정말이지 하루도 빠트리지 않는 운동과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에 늘 진심이었던 삼식씨는 이렇게 이식씨가 되었다. 협상결과에 몹시도 만족한 이순씨는 아침 겸 점심을 이전보다 조금 더 풍요롭게 준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아침메뉴 중에 하나였던 반숙 계란 한알을 브로콜리와 계란 스크램블이나 토마토+계란+가지 오믈렛으로 바꾼다거나. 점심과 저녁 사이의 간식도 역시 다양하게, 꼭, 챙기고 있다.
세끼 식사 중 한 끼를 줄인 이식씨와 이순씨에겐 생각지도 않았던 변화가 따라왔다. 평생 동안 별다른 회의 없이 고이 간직했던 수많은 고정관념 중 고작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늙어서 다 굳은 듯했던 머리가 조금 말랑해지며 이것저것 색다른 시도가 잇따랐다.
1969년, 달에 첫 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이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고 말한 것을 빌린다. "삼시 세끼 중 비록 한 끼를 줄인 것이지만, 삼식이와 삼순이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에는 거대한 도약이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