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6
오랜만에 토요일 운동을 갔다. 딸내미는 할머니 댁에서 집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규원이와 안해는 낮잠에 들었다. 날씨 좋은 토요일, 실내가 답답할 법 하지만 나에게 체육관은 바깥보다 쾌적했다.
토요일은 개인 운동을 한다. 도착해서 트렁크를 갈아 입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보통 혼자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주부로 보이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한참 다리 스트레칭을 하는데 러닝 머신 쪽에서 고성이 들렸다.
“야, 너 엄마가 하지 말랬지!”
“아아앙~~~!!!”
러닝 머신을 뛰던 엄마가 훌쩍 내려와 딸내미 등짝을 때리기 시작했다. 손에는 리모컨을 든 채. 쳐다보던 나까지 놀랬다.
“엄마가 위험하다고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진짜!!!!!!”
아마 아이가 돌아가고 있는 러닝 머신에 올라 서려했나 보다. 위험한 행동이었다. 엄마도 얼마나 놀랬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다음이 더 놀라웠다. 엄마는 등짝을 때리는 것도 모자라 발로 아이를 차기 시작했다. 서 너 번의 발길질이 이어진 뒤에야 엄마는 아이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나는 알 수 없는 불쾌감과 분노를 느꼈다. 엄마의 마음은 이해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아이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었다. 엄마의 놀랜 마음도,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급박함도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본 큰 감정 덩어리는 ‘분노'였다. 과연 저 아이는 엄마가 왜 본인에게 발길질을 했는지 이해했을까? 아니, 머리로 이해하더라도 납득이 될까? 물론 얼마 후 다시 아이는 웃으며 뛰어놀았고 엄마에게 달려가 애교를 부렸다. 그건 아이의 본능이다. 생존을 위한, 주양육자와의 관계를 위한 본능. 그러나 나는 내 가슴이 뛰고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예전이었으면 몰랐을 또 다른 본능,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과 아이를 돕고 싶다는 본능, 부모로서의 본능이었다. 그 후 운동을 하는 내내 나도 모르게 그 아이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 아이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부모는 흔히들 ‘한 번 제대로 혼내야 다시는 안 하지.’라는 말을 한다. 위험한 행동이나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아이에게 가혹할 정도로 화를 내거나 벌을 주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이를 통해 아이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 줄어들기도 한다. 그걸 보며 부모는 ‘내가 널 사랑하니까 그러는 거야. 거봐, 그렇게 하니까 안 하잖아.’라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나는 반대한다. 물론 아이를 존중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안 되는 선이 있다. 특히 아이의 안전과 건강에 관한 문제는 민감하고 단호하다. 그러나 그걸 단호하게 관철시키는 과정에서도 화를 내거나 폭력을 사용한 적은 없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라도 아이에게 화나 폭력은 가혹행위에 불과하다. 폭력을 통해서는 그 어떤 배움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이 줄지 않느냐고? 일시적으로 그럴지 몰라도 반대급부로 아이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가혹한 화나 폭력으로 아이의 행동이 변했다는 건 트라우마급의 상처로 틀어막은 거라고 보면 정확하다. 그리고 그 폭력은 높은 확률로 아이에게 학습된다. 아이는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똑같이 행동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걸 알게 된 부모는 이렇게 말할 확률이 높다.
“선생님, 걔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교사는 알겠는데 말이다.
‘아직 어리니까 따끔하게 가르쳐야죠.’
이렇게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부모들을 볼 때가 있다.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따끔하게 맞고, 욕먹고, 당해서 성장할 수 있다면 반대로 부모 자신에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도 된다고 인정해야 한다. 손을 들라고 하고 싶다. 내가 가서 때리고 욕하고 소리 지르고 싶으니까. 내가 당하기 싫은 건 아이도 당하기 싫은 거고, 그건 보편타당하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미사여구로, 사랑이라는 거짓말로 둘러대지 말라. 그냥 당신은 그 순간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쏟아부었을 뿐이다. 아이에 대한 사랑은 진실이지만 행동에 대한 변명은 거짓이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다. 말이든 신체든 그 어떤 걸로도 아이를, 타인을 때려서는 안 된다. 특히 사랑으로 연결된 가족 사이에서는 치명적인 불행을 낳는다. 나 자신도 다시 한번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