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 (2021.08.14.토) *

by clavecin

* 블랙 (2021.08.14.토) *


아주 오래 전, 인디 핑크로 일명 ‘깔맞춤’을 한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내가 질문했다.


- 선생님...혹시 오늘 기분 안좋아요??


그 선생님은 정말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 아...네....선생님... 어떻게 아셨어요??


- 제가 지금 색상에 대한 심리학 책을 읽고 있어서요...


‘오늘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라는 생각은, 매일 아침 직장인 누구나 하는 공통된 고민거리일 것이다. 상의와 하의에 어떤 옷을 맞추어야 하는지 결정하기가 어려울 때 흔히들 선택하는 것이 ‘원피스’나 비슷한 색상의 옷을 맞추는 일명 ‘깔맞춤’이다.


내가 읽은 심리학 책에서 ‘깔맞춤’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를 보완해주는 눈속임이라고 서술해 놓았었다. 그 내용을 읽으며 ‘아 그럴수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정확한 심리학적인 서술은 아니다. ‘깔맞춤’의 대가인 나의 선택을 보면 말이다. 그런 심오한 선택보다 단순한 깔맞춤의 편리성과 아름다움에 의한 선택일 뿐이다. 물론 기분이 안 좋을 때 더 차려입고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무슨 색깔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다른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 하는 흔한 질문 중 하나다. 어떤 색상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색상과 본인의 성격이 맞는지??

오렌지, 핑크, 산호색, 보라, 베이지 핑크, 인디 핑크 계통을 지나 머스타드, 민트, 녹색, 브라운까지, 내가 좋아하는 색상들이다. 의외로 화이트, 빨강, 블루 계통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행히 좋아하는 색상들이 나와 잘 어울리기에, 각각 따로 구입했지만 서로 잘 맞추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내가 정말 좋아하지만 그래서 조심스럽게 아끼는 것은 민트와 브라운이다. 특히 브라운 색상은 정말 좋아하고 귀하게 생각해서 앞으로 내가 사고 싶은 차 색상은 브라운으로 일찌감치 정해 놓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몇 년 전부터 빠져 있는 색상은 블랙이다.


블랙을 좋아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고 강한 성격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래서 블랙은 내가 일부러라도 선호하는 색상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옷장에 블랙옷만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사람이 멋쟁이여서일 것이다. 오죽하면 작년에는 어떤 학생이 나에게 질문했었다.

- 선생님.. 선생님은 검은색 옷은 안입으시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블랙은, 아무 때나 선택하는 색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한 색상이다. 블랙은..


블랙도 얼마나 종류가 많은지, 블랙이 한가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회색에 가까운 블랙, 화이트에 가까운 블랙, 아주 까만 블랙 등등.. 역시 함부로 맞추어 입을 수 있는 단순한 색상이 아니다.



출근 하기 전 유독 블랙이 당기는 날이 있다. 대부분 비가 오고 우중충한 날인데, 저번 달 어느 비 오는 날 운전하는 내 눈에 보였던 사람들은 모두 검은 옷을 깔맞춤한, 올블랙인 사람들이었다. 10명 중 9명이 그 날 블랙을 선택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비오는 날에 맞는 코디로는 짧고 화사한 옷을 입어야 된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을 꼭 따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쨋건 블랙은 멋진 색상이다.


방학이나 휴일에 하는 일직이라는 것이 있다. 다른 선생님들은 나오지 않으시고 일직 선생님들만 나와서 학교 행정을 살피고 학교를 ‘관리’하는 일인데 사실 누구나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순서대로 하는 일이기도 하고, 밀린 일을 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큰 부담은 없는 일이다.


보통은 2명씩 하기 때문에 누구와 함께 하는지가 중요하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루 내내 같이 있어야 하니 가능하면 ‘잘 맞는’ ‘내가 좋아하는’ ‘좀더 편한’ 사람과 같이 하면 좋을 수 있다. 그래서 일직 날짜가 정해지면 날짜도 날짜지만 함께 하는 사람을 먼저 살펴본다. 물론 아무나 상관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잘 몰랐던 선생님이었지만 같이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친해지는 경우도 많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줄 알고 기대했던 선생님이지만 몇 마디 하지 않고 각자의 일만 하다가 하루를 다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요즘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때이기도 하고, 이미 충분히 알고들 있기 때문에, 아님 서로 관심이 없어져서, 아님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시대니까, 어쨋건 각자 할 일을 하다가 가는 경우가 많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학생들이 나오지 않지만 올해도 역시 2명씩 배정이 되었다. 이번 방학에는 2일을 하게 되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함께 하게 된 선생님들이 마음에 들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편함이 없는,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들이었다. L선생님과 K선생님..


유쾌한 L선생님은 분홍색 체크 바지와 후드 런닝을 입고 다닐 정도로 패셔너블한 선생님이기에 나는 그 날 학교 수업 때는 도무지 입을 수 없었던 슬리브리스, 일명 ‘소대나시’ 옷을 입었다. 옆에 귀여운 러플도 있는 귀여운 옷이고 내가 좋아하는 옷이다. 날씨도 더웠지만 사실 L선생님과의 조화를 위한 패션이었다. 그 날 선생님은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반바지를 입고 오셨다. 선생님과 잘 어울리는 패션이었다.

다음 날은 K선생님과 일직이었는데 전날까지 나의 머리 속에는 ‘블랙 마스크’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K선생님의 트레이드 마크였으니까. 그 전날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우리 학교에 블랙 마스크를 하고 다니는 선생님 두 분이 계시는데 두 분 다 아주 멋진 선생님들이세요. 내일 그 중에 한 분, 우리 학교 졸업생인 선생님과 일직을 하는데, 눈이 아랍공주 같이 완전 예뻐요..

‘드레스 코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K선생님과 일직하는 날, 선생님과의 조화, 즉 ‘깔맞춤’을 위해서 나도 ‘블랙 마스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 날 모든 코디의 중심은 ‘블랙 마스크’였기에 어떤 옷을 입어야 어울릴지가 관건이었다. 블랙 마스크에는 블랙 옷이지만, 날씨가 더운데 블랙은..이러면서 고민하다가 일직에 어울리는 나름 가벼운 옷차림을 했다. 모든 코디의 중심은 ‘K선생님과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K선생님의 블랙 마스크에 부족함이 없는 옷차림’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블랙 마스크’를 되뇌이며 출근한 그 날, 나는 깜짝 놀라서 내 눈을 몇 번이나 깜박거렸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아님 내 눈이 잘못된 건가 라고 생각하면서... 7월 중순에 일직을 확인한 날부터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웠던 ‘블랙 마스크’에 맞춘 나의 정성과 열정을 무색케 한 K 선생님...


그 날 K선생님은, 내가 올해 단 한번도, 진짜 단 한번도 보지 못한 ‘하얀 마스크’를 하고 있었던 것...

선생님을 보자마자 완전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 어...선생님..하..얀...마스크...???

- ???

- 아니..왜... 블랙 마스크 안했어요??

- 아... 다 써서요....

- 아..왜요...ㅠㅠㅠ

- ???

- 선생님하고 깔맞춤하려고 오늘 블랙 마스크하고 온건데...하얀 마스크가 뭐예요.....



정말 슬펐다. K선생님과 일직하기 전부터 오늘을 위한 코디를 준비했다는 나의 이야기에 선생님들은 정성이라며 놀라셨지만, 아...나는 얼마나 아쉬웠는지...


핑크색, 보라색, 민트색과 블랙, 그리고 학교에는 잘 안하고 오지만 베이지 색상 등 몇 가지의 마스크가 있다.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애정(愛情)’하는 것은 ‘검은색, 블랙 마스크’이다. 아마도 모두들 모를 것이다. 내가 이 블랙 마스크를 얼마나 얼마나 사랑하는지... 옷과 마스크를 맞춰서 코디하려고 하지만, 블랙 마스크에 맞추어 코디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도...그리고 사실 이제는, 블랙 마스크만 하고 싶기도 하다는 것도.. 핑크와 보라색을 넘어서 이제는 블랙만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언제 이 뜨거운 여름이 지나갈까 싶은데 조금씩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다. 개학 날이 다가왔지만 아이들이 등교하게 될 때는 춘추복을 입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면서 뜨거웠던 바람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마스크를 벗게 되는 날이 있을까 싶은 요즘이지만, 언젠가는 마스크를 벗고 서로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되는 때가 오겠지... 그 때는 아마도, 이 블랙 마스크를 썼던 때를 그리워하게 되겠지...



- 러플 달린 슬리브리스 옷을 보았던 K선생님을 그 다음 날 학교에서 또 보게 되었다. 선생님이 나에게 질문한다.


- 선생님...어제의 그 훌러덩 옷은 안입으셨네요?? 시원해 보이던데..


- 훌러덩이요???


선생님의 그 단어에 떠나갈 듯이 서로 배꼽을 잡고 웃었다.


- 이번 주 내 프로필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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