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과 서로 바라보기 (2021.11.27.토) *
아주 옛날, 공중전화 박스 앞, 짝사랑하고 있는 여자 집으로 전화를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던 A가, 자기가 갑자기 전화하면 놀랄 것 같다고 뒤에 있는 B(여자)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그 전화 부탁을 시작으로 결국 A와 B가 맺어졌다며, 아침 라디오 방송으로 B가 보내온 이야기를 들었다.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만남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니까.. 여기서 ‘이런 일들’이란, ‘전혀 의도치 않았던 일들’로 이루어진 ‘운명’같은 일을 말한다.
40세라는 늦은 나이에 등단하여 81세에 생을 마치기 전까지 40년 동안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던 박완서(1931~2011)의 첫 작품 <나목(裸木)>에서는 ‘진짜 그림’을 그리고 싶지만 대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군 PX의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옥희도라는 화가가 등장하는데, 그는 결국 진짜 그림, <나목(裸木)> (나무와 여인) 을 남기는 대(大) 화가가 된다. 서울대학교 중퇴생이었던 박완서가 20세에 미군 PX에서 경리로 일하면서 알게 된 초상화부의 화가 박수근(1914~1965)과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낸 것이다.
박완서가 서울대를 중퇴하지 않았다면, PX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박수근이 초상화부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박완서와 박수근이 서로 만나지 않았다면, 만났더라도, 그동안 스치고 지나갔을 수많은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면...아마도 저 소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아이유의 노래를 소개하는 학생에게 질문했다.
- 노래는 굉장히 좋으네요... 드라마도 좋은가요??
- 네...제 인생드라마예요...한번 보세요 선생님...
학생의 추천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울었다. 이렇게 비참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 불쌍한 삶이 부여된 20대 초반의 여자 아이 C... 그녀의 어둡고 슬픈 흙빛 삶에서 반짝거리며 눈에 어른거리는 어떤 어른 한 사람 D.. 명대사가 굉장히 많은데 그 중의 하나..
- 잘 계셔..
할머니 잘 계시냐고도 물어보셨어..
그분이 나 밥도 잘 사주고 회사에서도 많이 도와주셔..
그분 아마 승진하실 것 같아..
- 근데 왜 울어..
- 좋아서..
나랑 친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게...
‘좋아서’...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친할머니에게 수화로 이 내용을 말하는 여자 주인공 C의 ‘좋아서’라는 단어가 얼마나 가슴 저리던지....그녀 주변에는 그야말로 아무도 없었지만 D라는 ‘좋은 아저씨’의 존재가 그녀의 삶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한다.
아무도 의미를 두지 않던 C의 짓밟힌 삶을 가만히 지켜보아 주는 사람으로 인해 그녀의 삶이 살아나고, D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던 자기의 삶을 적극적으로 바꿔 나가며 점점 더 좋은 어른으로 성숙해져 간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 이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같이 보이는 나의 삶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고 활짝 꽃을 피우고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면 말이다.
도대체 이런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되는 걸까......어디를 열심히 돌아다녀야 하는 걸까... 아님 지금 내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나도 또한 누군가를 재발견하게 되고 누군가에 의해 재발견이 되는 걸까....
내가 가진 책 중에 <천재, 천재를 만나다(한스 노인치히 저)>라는 책이 있다. 정말 매력적인 제목이다. ‘천재, 천재를 만나다’를 다시 풀이하자면, ‘천재, 서로를 알아보다’로 풀이할 수 있을 듯 하다. ‘내 모습과 비슷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본다’는 말이겠지...
괴테와 실러, 사르트르와 카뮈, 바그너와 니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등 수많은 예술가와 소설가 등 같은 시대를 살았던 유명인들이 서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정을 하기도, 서로 적대하기도 하는 다양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런 관계의 으르렁거림을 통해 이들은 세상에 역작을 내놓기도 또는 이내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또 <예술가의 지도(김미라 저)>라는 책도 있다. 부제가 ‘예술가의 초상, 그리고 그들의 네트워크’이다.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들의 삶이 어떻게 서로 엮어져 있는지를 나타내주는 책이다. 주로 19C ~ 20C까지에 살았던 유명, 무명의 예술가들과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와있다. 정말 인(人)적인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해서 서로를 알아본 것이 아니고 서로 부대끼며 좋고 나쁜 영향을 주다 보니 유명해지게 되고 이렇게 기록이 되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명의 예술가가 키워지려면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필요하다고도 할 수 있을 듯.... 나는 나 혼자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1946~ . 유고슬라비아)라는 유명한 행위예술가가 있다. 획기적인 행위예술로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는 1976년 울라이라는 사진작가를 만나 12년 동안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다가 1988년,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각자 걸어와서 중간 지점에서 서로가 마주하게 될 때 조용히 작별 인사와 마지막 포옹을 하고 서로 스쳐서 다시 각자의 길을 약 2,400km 이상을 걸어가는 <The Lovers> 퍼포먼스를 끝으로 헤어진다. 두 사람은 연인이자 동지였지만 22년 동안 헤어져 있었고 그동안 아브라모비치는 더 유명한 작가가 된다.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The Artist Is Present>라는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는데, 이 행사는 탁자 한쪽에 아브라모비치가 앉아있고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한 명씩 앉아서 대화도 없고 표정도 없이 1분동안 이방인인 서로를 바라만 보는 퍼포먼스였다. 단지 바라만 보는 것이지만 무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사람, 미소 짓는 사람, 숨을 쉬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다.
이때 아브라모비치의 예술 파트너였던 울라이가 그 의자에 앉게 되면서 22년만의 깜짝 재회를 하게 된다.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 퍼포먼스의 원칙이었는데, 22년이 지난 모습의 울라이를 보게 된 그녀의 표정이 흔들리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양손을 내밀어 잠깐 동안 서로 마주 잡는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그들이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느껴졌다는 것..... 울라이는 2020년에 타계한다...
적지 않은 사람과 같은 시대를 살았고 심지어 수십 년 동안 같은 공간에 있기도 하였고 수천 번 스쳐 지나가며 부딪히기도 하였겠지만,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 한번도 못하고 눈길 한번도 주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잊혀져 가고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바로 지금...
지나고 나면 알게 될까...
나의 삶에 당신이 어떤 귀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당신의 삶에 내가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지..
나중에 기억은 될지..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서로의 가치와 귀함을 알아보면 어떠할지..
행여 못 알아보면 흔들어 알려주면 좋겠는데...
행여 스쳐 지나가면 붙잡아서 눈앞에 데려다 놓으면 좋겠는데...
행여 말 한마디, 표현 하나 하지 못하고 있으면 먼저 해 주면 안될까...
바로 지금 여기서,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을 놓치지 말고 마주하고 정면으로 서로 똑바로 바라보기.....
*** 2010년 미국 MOMA 미술관에서 아브라모비치와 울라이의 만남...
https://www.youtube.com/watch?v=9SQsQR5enI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