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일생의 행복이 되는 경험

일상(日常)이 일생(一生)의 행복(Bliss)이 되는 경험

by 삶은 예술 박기열

일상(日常)이 일생(一生)의 행복(Bliss)이 되는 경험


군 복무 시절 경험했던 어떤 하루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 멀리 여수에서 군 생활을 했던 나는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안초소로 투입이 되었는데 그날은 마침 토요일 전투 체육의 날이었다.

초소 근처 작은 시골 분교 운동장에서 중대원들과 전쟁처럼 치열한 축구시합을 했고 격한 운동 후 다들 심한 갈증을 느끼던 차였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을까. 결국 중대의 막내인 내가 음료수 심부름을 명(命)받았는데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 마을 어귀 구멍가게까지 내려가려면 작렬하는 땡볕에 적어도 왕복 한 시간 가까이 걸어야 했다.

더위가 최고로 기승을 부리던 7월 중순쯤이었으니 불볕더위가 계속되고 있는 요즘 날씨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더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축구시합 내내 공을 주우러 다니느라 바빴던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나도 부대원들처럼 나무 밑 그늘에 드러누워 쉬고 싶었지만 까라면 까는 것이 군인 아닌가.

신병답게 씩씩한 척, 지폐 몇 장을 받아 쥐고 뜨거운 아스팔트 옆으로 발목까지 풀이 자란 갓길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걸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모른다.

똑같이 힘든데 나한테만 이런 일을 시킨 고참이 미웠고 흐릿한 기억이지만 군인인 내 처지를 비관했었던 것 같다.

무거운 음료수 봉지를 양손 가득 움켜쥐고 돌아오는 길.

해가 저무는 오후였지만 땅의 열이 채 식지 않아 발바닥은 뜨겁고 온몸의 땀이 다 흘러넘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던 바로 그 순간.


사진1) Gimpo 2021, photo by 박기열.jpg Gimpo 2021, photo by 박기열

언덕을 오르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아름다운 노을.

그때까지 그 어떤 영화나 사진에서도 난 그렇게 황홀한 색의 하늘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양손에 쥐고 있던 음료수 봉지가 어느새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고 힘들다는 생각도 잊은 채,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무언가에 이끌리듯 하늘을 쳐다보며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절대 이 순간을 잊지 말자. 내 인생 어느 날에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이 있었음을 꼭 기억하자.”라고. 그런 생각이 드니 심부름을 시켰던 그 고참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3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지만 난 여전히 힘든 일이 있거나 어떤 결과에 다다르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침잠하는 순간이 오면 오래전 황홀했던 그 날의 하늘을 떠올린다.

평범한 일상이 평생 잊지 못할 더없는 행복으로 되돌아온 그 하늘을.


더없는 행복(Bliss)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양한 관점과 시각으로 바라보고 전달하는 지리, 인문에 관한 세계 최고의 월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

찰스 오리어(Charles O’Rear)는 이 회사에서 24년간 사진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일하다 퇴직을 한 사람이다.

퇴직 후 그는 집 근처 와인 양조장(와이너리)을 다니며 와인을 시음하거나 그에 관한 기사를 쓰는 등 소일거리로 여유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평생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짊어지고 세계 곳곳 거칠고 위험한 현장을 누볐던 오리어의 지난 삶에 비추어보면 한적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늘 다니던 길가 옆 포도밭은 병충해로 인해 나무를 모두 뽑아낸 후 새로운 잔디가 막 자라기 시작한 상태였고 포도나무가 없어진 낯선 풍경에서 오히려 평화롭고 따뜻한 느낌을 받은 그는 평생 사진기자로 살았던 자신의 촉을 발휘해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2)윈도우XP의  바탕화면이 된 Bliss .jpg 윈도우XP의 바탕화면이 된 Bliss

이날 그가 찍은 ‘Bliss(더없는 행복)’라는 제목의 사진은 마이크로 소프트의 운영체계인 윈도우 XP의 바탕화면으로 채택되었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사용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컴퓨터 그래픽이라 생각했던 바탕화면 속의 푸르른 언덕이 실제 사진이란 사실에 놀란다, 또한 그의 사진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사진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로 10여 년간 10억 개, 어둠의 경로를 통한 다운로드까지 포함하면 20억 개 정도가 전 세계인의 컴퓨터에 깔렸을 테니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다.

자신이 촬영한 사진이 이렇게 유명해질지 몰랐다는 오리어의 말처럼 일생(一生)에서 한번 만날까말까 하는 ‘최고의 순간’은 내 인생의 하루하루를 채워주는 ‘반복된 일상(日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진3).Charles O’Rear.jpg Charles O’Rear


사진4)PC시대 최고의 인생 역작을 남긴 오리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모바일 기계에 최적화된 세로 풍경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png PC시대 최고의 인생 역작을 남긴 오리어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모바일 기계에 최적화된 세로 풍경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일생 최고의 순간은 우리가 사는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만약, 당신이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순간을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숨을 죽이고 라디오의 주파수를 조정하듯,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듯 당신의 눈과 귀, 마음과 머리의 감도를 미세하게 조정해보기 바란다.

모든 게 선명해질 때까지 다이얼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번거로움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몸 안의 감각기관을 모두 열어놓고 평범한 일상을 세밀하고 깊숙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면 당신이 찾던 일생일대 최고의 순간을 언제든 만나게 될 것이다.

더없는 행복(Bliss)은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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