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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 예술 박기열 Aug 08. 2018

삶은 예술 8 - 일상이 일생의 행복이 되는 경험

일상(日常)이 일생(一生)의 행복(Bliss)이 되는 경험

군 복무 시절 경험했던 어떤 하루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 멀리 여수에서 군 생활을 했던 나는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안초소로 투입이 되었는데 그 날은 마침 토요일 전투체육의 날이었다. 

초소 근처 작은 시골 분교 운동장에서 중대원들과 전쟁 같은 축구시합을 했고 격한 운동 후 다들 물이 아닌 시원하고 달달한 마실 것을 원하던 상태였다.

결국 중대의 막내인 내가 음료수 심부름을 명(命) 받았는데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는 마을 입구 구멍가게까지 가려면 작렬하는 땡볕에 적어도 30분 이상은 걸어야 한다.

더위가 최고로 기승을 부리던 7월 중순쯤이었으니 무더위가 지속되고 있는 요즘의 날씨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더웠는지 이해가 빠르겠다. 

축구시합 내내 뛰어다니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터질 것 같아 나무 밑 그늘에서 나 역시 다른 부대원들처럼 드러누워 쉬고 싶었지만 까라면 까는 것이 군인의 도리.

안 그런 척 씩씩하게 지폐 몇 장을 받아 쥐고 터벅터벅 뜨거운 아스팔트 옆 갓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걸으면서 속으로 얼마나 많은 욕을 했는지 모른다. 

똑같이 힘든데 나한테만 이런 일을 시킨 고참이 밉고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군인인 내 처지도 함께 비관했던 것 같다. 

그렇게 무거운 음료수 봉지를 양 손 가득 쥐고 돌아오는 길. 

오후였지만 땅의 열이 채 식지 않은 까닭에 발바닥은 뜨겁고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 곧 쓰러질 것만 같았던 그 순간.

언덕을 오르다 우연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난생처음 보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아름다운 노을. 

그때까지 그 어떤 영화나 사진에서도 난 그렇게 아름다운 색의 하늘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양 손에 쥐고 있던 음료수 봉지도 어느새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지고 힘들다는 생각도 잊어버린 채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무언가에 이끌리듯 하늘만 보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절대 이 순간을 잊지 말자.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이 있음을 꼭 기억하자.” 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자 심부름을 시켰던 그 고참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2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지만 난 여전히 힘든 일이 있거나 어떤 결과에 다다르지 못하고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겪을 때마다 그 날의 하늘을 떠올린다. 

평범한 일상이 일생동안 간직할 수 있는 더없이 행복한 순간으로 되돌아온 그 날을 말이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흥미롭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전달하는 지리, 인문에 관한 세계 최고의 월간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National Geographic)’

찰스 오리어(Charles O’Rear)는 이 회사에서 24년 간 사진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일하다 퇴직을 한 사람이다. 

퇴직 후 그는 집 근처 와인 양조장(와이너리)을 다니며 와인을 마시거나 그에 관한 기사를 쓰는 등 소일거리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평생 동안 그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짊어지고 세계 곳곳의 거칠고 위험한 현장을 누볐던 오리어의 지난 삶에 비추어보면 한적하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늘 다니던 길가 옆 포도밭은 병충해로 인해 나무를 모두 뽑아낸 후 새로운 잔디가 막 자라기 시작한 상태였고 포도나무가 없어진 낯선 풍경에서 오히려 평화롭고 따뜻한 느낌을 받은 그는 평생 사진기자로 살았던 자신의 촉을 발휘해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 날 그가 찍은 ‘Bliss(지극한 행복)’라는 제목의 사진은 마이크로 소프트의 운영체계인 윈도우 XP의 바탕화면으로 채택되었고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 세계 사용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사람들은 컴퓨터 그래픽이라 생각했던 바탕화면 속의 푸르른 언덕이 실제 사진이란 사실에 놀란다, 또한 그의 사진을 보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또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본 사진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로 10여 년간 10억 개, 어둠의 경로를 통한 다운로드까지 포함하면 20억 개 정도가 전 세계인의 컴퓨터에 깔렸을 테니 과장된 이야기도 아니다.


실제 배경 앞에서 작품을 들고 서있는 오리어

자신이 촬영한 사진이 이렇게 유명해질지 몰랐다는 오리어의 말처럼 일생(一生)에서 한번 만날까 말까 하는 ‘최고의 순간’은 내 인생의 하루하루를 채워주는 ‘반복된 일상(日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일생 최고의 순간은 우리가 사는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만약, 당신이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순간을 만나지 못했다면 거실의 TV 리모컨을 조정하듯이 당신의 눈과 귀, 마음과 머리의 감도를 미세하게 조정해보기 바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주파수를 맞춰 보자. 

이번에는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번거로움도 반드시 감수해야 한다.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놓고 평범한 일상을 세심하고 다양하게 관찰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면 지금이 바로 당신이 찾던 일생일대 최고의 순간이 될 수도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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