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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삶은 예술 박기열 Jun 19. 2019

곰, 사자 그리고 종려나무

섹거비의 추억

곰, 사자 그리고 종려나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이 칸(cannes)으로부터 전해졌다.

이는 한국영화 100년 사에 있어 가장 권위 있고 영예로운 상이자 우리의 영화가 세계적 반열에 올라섰음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황금종려상이라는 게 영화계에선 올림픽 금메달만큼, 월드컵 트로피만큼이나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란 걸 강조하며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내가 어렸을 적엔 동네 여기저기마다 비디오 가게가 많았다. 

어느 시점을 지나 비디오가 사라지고 나선 만화책 대여를 겸한 DVD 가게가, 그 이후엔 유사업종이 모두 자취를 감췄다.  

나도 한때는 오전에 비디오 3~4편을 빌려 그날 저녁을 먹기 전에 모두 반납하던 모범 손님으로 비디오 가게 사장님의 신망을 듬뿍 받던 동네 영화광 아니던가?

혓바닥 내밀 듯 들락날락하던 VHS (가정용 비디오테이프 레코더 방식) 테이프를 밀어 넣고 영화가 시작되기 기다리는 설레던 마음. 그 작고 네모난 플라스틱 박스 안에는 내 인생의 액션과 서스펜스는 물론, 로맨스까지 다 들어있었다.      

고1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성에 눈을 뜬 것은 사실 그보다 한참이나 오래전이었지만 혈기가 왕성하여 늘 분기탱천해 있던 당시 2차 성징을 마무리 짓던 고등학생에게 ‘섹스’ 란 단어는 자이로드롭만큼이나 쫄깃하고 아찔한 단어였다. 

국어사전을 찾아도 ‘ㅅ’ 이 제일 진하게 보이고 영어사전을 넘기다 ‘ S ’만 보여도 움찔하던 그때. 때마침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라는 영화를 상영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감독이나 주연배우에는 관심조차 없었고 오로지 나의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원색적인 제목에만 집중했다.

‘섹스’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리는데 게다가 비디오테이프라니..

중학교 때 친구 집 안방 장롱 속에서 발견했던 빨간 비디오테이프에 얽힌 추억들을 떠올리다가 얼굴마저 빨개진 나는 곧바로 절친한 친구들을 꼬드기기 시작했다. 

유유상종이라고 나와 비슷한 녀석들이니 영화 제목만 듣고도 꿀꺽 침을 삼킨다. 

같은 기대와 목적을 가진 친구 대 여섯 명을 모아 극장 입성에 성공한 후 콜라와 팝콘 몇 봉지를 손에 쥐고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날따라 대한 뉘우스는 왜 그리 긴지..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고 우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기다렸다. 제목에 어울릴만한 장면들을..

우선 등장인물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아주 맘에 들었다. 어중이떠중이 다 나와서 떠들어봤자 

우리들이 간절히 바라던 장면들이 줄어들 테니까. 그러나 이 영화, 상당한 인내심을 요구한다. 1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슬슬 친구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지만 의리에 목숨을 거는 내 친구들은 기특하게도 잘 견뎌주고 있다.  



제목대로 영화 속 주인공은 비디오를 찍는다. 하지만 액션은 없고 그저 인터뷰 형식의 영상이다. 자기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녹화하는데 거짓말에 관한 것들도 있는 것 같고 어쨌건 당시 청소년이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참고 기다렸다. 인터뷰 후에 찍게 될 본격적인 영상을.     

“ 이제 그거만 나오면 된다. 그거만.”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있다. 

아직 옆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이미 스크린 속에 분노에 찬 내 친구들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여주인공의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했는데...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기껏해야 고1이었던 내가 제목에 낚였던 이 영화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그 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든 말든 알게 뭐냔 말이다.

이제는 황금 종려상의 가치도 알고 지루함 속에 담긴 깊은 철학적 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지만 30년이 훌쩍 지난 이 에피소드 덕에 지금도 가끔씩 친구들은 내가 무슨 의견을 제시할라치면 일제히 “섹거비!”(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줄임말)라 외치며 쌍심지를 켠다. 입 다물란 얘기다.     

만약, 당신이 사는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 블록버스터 영화만 골라봤었다면 이번 휴가 때는 시원한 맥주와 치킨을 옆에 끼고 각 종 영화제의 역대 수상작들을 밤새워 섭렵해보는 건 어떨까?          

 


◆ 모두가 다 아는 간단 상식

  세계 3대 영화제 중 베를린 영화제의 대상은 황금 곰상, 베니스 영화제의 대상은 황금

  사자상, 그리고 이번에 봉준호 감독이 수상한 황금 종려상은 칸 영화제의 대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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