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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yton Jan 13. 2020

우천 중단의 낭만에 대하여

필라델피아 필리스 vs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2009.08.19)

모든 것이 예상한 대로, 예정된 대로 흘러가는 삶이란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을까. 삶이 그러하듯 인생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야구에도 의외성이 주는 묘미가 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 경기의 흐름을 미묘하게 바꾸기도 하고, 그 상황이 승부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경기 중 갑자기 내리는 비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진 = 시카고 컵스 공식 SNS

비가 승부의 향방을 바꾼 경기는 수도 없이 많다. 최근에는 2016년 월드시리즈 7차전(시카고 컵스: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경기가 기억에 남는다. 월드시리즈 7차전은 말 그대로 끝장승부다. 그 경기의 승패로 인해 우승팀이 결정되는, 당사자들(선수단, 해당팀 팬들)에게는 잔인한 게임이기도 하다.


8회 말 공격 전까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3:6으로 뒤지며 패색이 짙었다. 설상가상으로 시카고 컵스는 2사 이후 100마일의 강속구를 자랑하는 마무리 아롤디스 채프먼을 조기에 투입하며 초강수를 던진 상황. 하지만 인디언스도 끝까지 추격의 끈을 놓지 않았다. 브랜든 가이어의 2루타로 한 점을 따라붙더니 라자이 데이비스의 투런 홈런으로 순식간에 경기를 동점으로 만든 것.


하늘로 치솟던 인디언스의 기세를 꺾은 것은 다름 아닌 비였다. 연장전을 앞두고 비로 인해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고, 그 사이 컵스는 전열을 가다듬었다. 연장 10회 초 컵스는 두 점을 득점하며 다시 앞서 나갔고, 되찾아온 흐름을 다시 놓치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그렇게 컵스는 비의 도움을 받아 무려 108년 만의 감격적인 우승을 차지했다.

비 내리는 필리스의 홈 시티즌스 뱅크 파크. (C) clayton

경기의 흐름도 흐름이지만 우천 중단은 그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에게 색다른 추억과 낭만을 선사한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그라운드는 잠시 평화를 되찾는다. 경기장 내에는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팬들은 저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비가 이내 그쳐 경기가 재개되기를 기다리며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간을 보낸다. 어떤 이는 평소에 눈여겨보지 않았던 경기장 구석구석을 구경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같이 온 지인들과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비를 맞으면서까지 더그아웃과 불펜 근처에서 선수들과 대화를 시도하기도 한다.


직관했던 2009년 8월 19일 경기 역시 그랬다. 지금까지 직관했던 경기 중 유일하게 우천 중단을 경험했던 경기이기도 하다. 3회 말까지 진행되었던 경기는 갑자기 내린 폭우로 인해 1시간가량 중단되었다. 메이저리그는 우천으로 인한 경기 취소에 매우 인색한 편이다. 같은 지구 팀과의 경기가 아니라면 긴 이동거리 탓에 추후 일정을 잡는 것이 힘든 탓이다. 성급하게 경기 취소를 결정하기보다는 기상예보를 참고하여 웬만하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경기 재개를 선택한다.


비로 인해 중단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경기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은 더 커진다. 타자보다는 아무래도 투수 쪽에 끼치는 영향이 크다. 흔히 '어깨가 식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통상적으로 경기가 재개되면 어깨가 식은 투수를 교체해 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날 선발 등판했던 필리스의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경기가 재개된 4회, 제이미 모이어로 교체되어 그날 투구를 마쳤다. 계속된 부진으로 인해 불펜으로 밀려났던 노장 투수 모이어가 기회를 잡았고, 모이어는 나머지 6이닝을 모두 소화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만약 비로 인해 경기가 중단되지 않았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큰 변수가 없는 한 페드로 마르티네즈는 4회에도 투구를 이어나갔을 것이고 경기의 흐름이 언제 바뀌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개폐식 돔구장 세이프코 필드. (C) clayton

국내의 한 야구인은 야구중계뿐만 아니라 방송 중 기회가 될 때마다 끊임없이 돔 예찬론을 펼친다. 그로 인해 기-승-전-돔이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렇다. 돔구장은 지붕을 닫음으로 인해 '날씨'라는 불확실성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 대신 불확실성이 주는 낭만은 앗아간다.


물론 돔구장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날씨로 인해 경기를 직접 뛰는 선수들이나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이 불편을 겪는 일이 시즌 중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라면 돔구장 유치를 고려해볼 만하다. 다만 그 불편의 빈도가 잦지 않다면 일 년에 몇 경기 정도는 불편을 감수해보는 것은 어떨까. 불확실성이 주는 색다른 재미와 추억, 낭만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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