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코필드 투어 (2017.06.15)
"혹시 LA에서 오셨나요? 시애틀은 비즈니스 때문에 오신 건가요?"
"아뇨. 전 한국에서 왔고요. 가족과 함께 여행 온 거예요."
시애틀 여행 마지막 날, 새벽부터 서둘러 숙소를 빠져나온 건 미국 본토 크로스핏 박스 체험을 위해서였다. 당시 메이저리그와 크로스핏에 한창 심취해있던 때였다. 시애틀 여행을 계획할 때부터 현지 크로스핏 박스 체험은 꼭 해보고 싶었다. 가족들과 같이 간 여행이었기에 내 맘대로 일정을 조정하기는 어려웠다. 다행히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출국 날 아침에서야 시간이 났고, 숙소 근처 크로스핏 박스의 아침 6시 첫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시간대에 고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현지인들이었다. 체험수업에 홀로 참여한 동양인의 존재만으로도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는데, 온통 이목은 내가 입고 있던 운동복에 쏠렸다. LA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티셔츠였는데, 시애틀 현지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아했던 모양이다.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걸며 LA 티셔츠를 입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물었고, 나는 다저스의 팬이라서 그렇노라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몸은 시애틀에 있었지만 눈과 귀는 LA로 향해있었다. 시애틀에 도착했을 당시 다저스는 신시내티 레즈와의 홈 3연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그 경기를 보기 위해 시애틀-LA 비행편을 급하게 알아볼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혼자 간 것도 아니고 가족과 같이 간 여행지에서 고작 야구 경기를 위해 혼자 LA를 가겠다고? 평소에도 지겹도록 보는 게 야구인데 여행까지 가서 야구를 못 놓는 이유는 도대체 뭐야?
그만큼 2017년 그 당시의 다저스 야구가 재미있었다는 것 밖에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가장 공이 컸던 건 누가 뭐래도 '슈퍼루키' 코디 벨린져의 활약이었다. 4월 말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선수는 연일 홈런포를 가동하며 다저스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시애틀 여행 당시 다저스는 신시내티 홈 3연전을 싹쓸이한 후 클리블랜드 원정길에 올랐는데, 클리블랜드에서도 벨린져의 활약은 빛났다. 벨린져는 시리즈 첫 경기에서만 두 개의 홈런포를 가동했다. 그중 하나는 당시 최고 좌완 불펜이었던 앤드류 밀러를 상대로 8회 초에 터뜨린 결승홈런이었다. 앤드류 밀러는 다음 날 경기에서도 8회 초, 대타 키케 에르난데스에게 결승홈런을 헌납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최고의 좌완 불펜요원인 앤드류 밀러가 두 경기 연속 홈런으로 무너져 당시 화제가 된 시리즈였다.
어쨌거나 몸은 시애틀에 있는 관계로 시애틀 매리너스의 홈구장 세이프코 필드는 구장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메이저리그 각 구장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구장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주로 경기가 없는 날에 진행된다. 굳이 야구경기에 흥미가 없지만 야구장은 구경하고 싶은 경우 투어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투어 프로그램이 좋은 점 중 하나는 클럽하우스, 더그아웃, 기자회견장 등 경기가 있는 날에는 일반 팬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장소들을 가이드와 함께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가능한 건 아니지만 운이 좋으면 그라운드 잔디를 직접 밟아볼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세이프코 필드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영상으로 접했던 여러 순간들이 떠올랐다. 박찬호가 선수생활 마지막 올스타전에 출전한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홈런을 선물(?)했던 2001년 메이저리그 올스타 경기, 2004년 이치로가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을 깼던 순간, 2012년 킹 펠릭스의 메이저리그 23번째 퍼펙트게임 달성 순간, 2016년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이대호가 끝내기 홈런을 터뜨렸던 순간 등등이 말이다.
비록 매리너스의 팬은 아니지만 영상으로만 접했던 곳에서 직접 서서 과거 영광의 순간들을 떠올리니 어쩐지 약간 벅차올랐다. '그 경기를 직접 본 팬들은 아마도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겠지?'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르자 그 순간을 직접 본 그 눈이 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