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에서 발원하여 사회 상태로 구체화
본 글은 아래 두 글의 후속글이므로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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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도덕적인가, 무엇이 옳은가, 어떤 것이 선한 것인가와 같은 물음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논의된 주제이다. 이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각자만의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을 통해 인간 삶을 바라보며 어떤 인간이 좋은 인간인지를 판단하고자 하였다. 옳은 것, 마땅한 것을 잘 따르면 도덕적이고 좋은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그른 것으로 지양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덕적인 삶을 지향하기 전에 무엇이 도덕적인 것이며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단순히 어떤 것을 좋다고 정한 다음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은 그저 피상적인 주장일 뿐 그곳에서 깊이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이나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 속 철학자들은 각자 주장하는 바에 따라 도덕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리고 왜 그것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예를 들어 칸트는 도덕이 인간의 이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이성에서 나온 도덕을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어떤 도덕론들은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다. 개중에는 사실과 당위를 혼동하거나 인간 이성이 알 수 없는 명제를 상상하여 주장하고, 먼저 증명해야 하는 문제를 전제로 하여 결론을 낸 주장들이 많다. 이러한 문제들은 도덕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왜 존재하는지, 왜 따라야 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며 이에 독단적인 결과를 내는 오류를 만든다.
그렇기에 필자는 도덕을 의지의 필수 조건으로 설정하여 왜 도덕이 존재하며 그것을 왜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의지로부터 도덕이 나온다는 것, 즉 인간이 의지를 가질 때 그 의지의 필수 조건이 생긴다. 이를 따르지 않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에 반드시 따라야만 하며 이로부터 도덕과 당위성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대전제로 하여 실제 현실을 보면 도덕은 사회 상태에 의해 정의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인간은 그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규칙이 뒤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한 도덕은 사회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그 사회에 가장 알맞은 처방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의사가 인간을 건강검진할 때 신체 전반을 들여다보듯, 도덕 역시 사회 전반의 상태를 아울러 고려해 정의되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사회에서 도덕은 사회 상태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며 사회를 안정적으로 영속시키는 수단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설명은 모호한 감이 있다. 이러한 논의는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바라본 바는 그저 논리 수준에만 그쳐 궁극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애매한 정도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의지가 도덕을 발생시키며 사회 상태에 의해 정의되는 도덕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해설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주요 개념들의 의미를 정의하고 이로부터 도덕이 나타나는 원리, 도덕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등을 천착할 것이다. 다만 논의의 전제가 되는 명제들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므로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므로 필자가 당연시하고 있는 전제에 의문이 생긴 독자들은 이전 글을 읽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도덕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후 여러 논의를 하기에 앞서 도덕 자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를 통해 도덕과 그 속성을 파악해야 그것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도덕의 근본적인 뿌리를 의지의 필수 조건으로 정의하였다. 인간이 의지를 가질 때 인간은 이에 모순되지 않도록 여러 규칙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는 관찰 가능한 것이며 도덕의 규범적 속성을 보장해 주는 정의이다.
의지는 욕망과 구분되는 것으로, 욕망을 이성의 작용을 통해 능동적인 행위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수많은 욕망이 이미 내재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러한 정신을 통합할 수 있는 체계인 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그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행위로 나타낸 의지를 이성이 가지면 그 순간부터 인간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규칙 또는 해도 되는 행위에 제약이 생긴다. 그것은 의지의 행위 명제의 반명제 또는 여집합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지에 모순하여 양립하기 어렵거나 의지를 방해하는 명제들을 뜻한다. 즉 인간이 능동적인 의지를 가졌을 때 필연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행위 또는 함께 하기 어려운 행위들이 생겨나게 된다. 예를 들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올 행위를 일체 거부해야 한다. 만일 이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한다면 그 인간의 의지는 실패하게 된다. 행복하게 살고자 함에도 무모하게 살아 쉽게 위험에 노출되거나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지 않아 병에 걸리게 된다면 의지 실현에 반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의지를 부정한 것이 되며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의지는 현실적인 실천의 영역이므로 만일 이에 반하는 행위를 하게 되면 즉시 모순이 구체화된다. 이것이 단순히 내면에 내재하고 있는 욕망이 의지와 구별되는 점이며 이로써 도덕의 당위성이 보장된다.
욕망과 의지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의지는 능동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적 개념인데 반해 욕망은 내면적이고 추상적이며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 배부르게 먹고자 하는 욕망 등 인간은 수많은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 이를 통해 도덕의 당위성을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다. 단순히 원한다와 같이 강제적이지 않고 선택적인 명제로부터 당위성을 가지는 명제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아무리 인간이 어떠한 것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다만 아쉬울 따름이며 여기에서 어떠한 모순이나 구조적 충돌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의지는 이러한 내재적인 욕망과 다르다. 앞서 말했듯 의지는 실천의 영역이므로 이를 실현하기 위한 능동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 의지의 실현이 부정되게 된다. 욕망은 반하는 행위를 하더라도 부정되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의지는 결과적으로 실패함으로써 충돌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의지는 도덕의 당위성을 보장하여 준다.
이때 수많은 욕망으로부터 수많은 의지가 나타날 수 있으며 이 의지 단위에서는 서로 상충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1차적인 의지들은 서로가 독립적인 것으로, 행동 규칙과 달리 상위 개념을 통해 판단할 근거가 없기에 인간은 여기서 선택할 필요가 생긴다. 이러한 1차적인 힘은 그 존재 자체로는 서로 동등하며 우열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어떠한 의지가 더 강한지에 따라 선택하고, 그때부터는 선택한 의지에 따라 2차적인 행동 규칙 명제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본래 1차적인 의지 명제였던 것을 피한다는 형식으로 이 2차적인 명제가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의지를 결정하는 즉시 논리적 정합성을 위한 종속적인 명제가 나타나며 이 2차적인 명제들에 대해서는 상위 명제를 통해 판단할 근거가 생긴다. 그러나 1차적인 의지는 자의적인 것으로, 대전제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의지 자체는 당위성을 가지지 못하며 오직 가언 명령의 형식을 가진 2차적 행동 규칙만이 도덕의 자격을 가질 수 있다.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필자는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인간들의 집합으로 이를 바라본다. 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에서 이미 의지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하며 실제로 이행한다. 물론 인간에게는 수많은 의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의지들은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 서로가 반명제거나 여집합에 해당할 수도 있다. 이때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데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 유지의 의지를 선택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의지로부터 인간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할 당위성이 비롯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인간들은 일정한 규칙을 이루어 그것을 도덕으로 삼고 이를 근원으로 하여 그 위에 법과 제도를 쌓는다. 그리고 인간들은 앞서 비롯된 당위성에 따라 이 도덕과 법을 잘 따름으로써 사회를 영속시킬 의무를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 바라보면 도덕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왜 도덕을 따라야만 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 도덕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착하게 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려주지만 정작 무엇이 착한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이를 알려주는 것이 사회 상태이다. 사회 상태란 그 사회의 경제, 문화, 교육, 국방, 국민 수준, 심지어는 인간적 특징까지 광범위하게 포괄하여 말 그대로 그 사회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앞서 우리는 도덕의 근원을 의지 실현의 수단으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 수단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등을 정확히 살펴보아야 제대로 된 도덕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사회 상태는 어떤 수단이 가장 올바른 수단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지표이다.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를 안정적으로 영속시키는 것이나 이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마치 우리가 건강하게 살고는 싶지만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는지는 모르는 격이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병원을 찾아 건강 검진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파악하면 이를 통해 알맞은 처방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때 건강검진을 할 때 우리는 단순히 어떤 조직, 기관 하나만 바라보지 않는다. 전신, 또는 여러 기관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건강을 총체적으로 검진한다. 그래야 우리의 건강을 자세하고 정확히 알아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상태도 이와 같다. 우리에게는 사회를 안정적으로 영속시키기 위하여 도덕이 필요하지만 그 도덕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는 건강해지기 위하여 어떤 약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 약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것과 같다. 즉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도록 하는 도구로써 사회 상태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건강 검진을 하듯 사회 상태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사회의 특징을 하나하나 파악함으로써 현재 사회의 불안정성, 그것을 유발하는 원인을 진단한다. 그리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약으로써 도덕의 내용이 결정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므로 이로부터 따라야 할 도덕이 나타난다. 이렇게 나타난 도덕은 사회를 유지하는 목적을 가진 수단이므로 사회에 종속되어 그 내용이 결정된다. 사회와 동떨어진 너무 이상적이거나 현실과 맞지 않는 도덕은 오히려 혼란만 초래할 것이므로 옳지 못한 도덕이 된다. 또 사회의 일부만을 반영하는 것 역시 전체 사회를 이롭게 할 수 있으리란 보장을 하지 못하기에 종합적으로 사회를 분석해야 한다. 이로써 그 사회의 경제, 교육, 국민, 문화, 심지어 그 사회를 이루는 인간의 특징까지 전부 아우르는 사회 상태를 분석할 필요가 생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를 가장 잘 안정시켜 주는 도덕을 찾는다. 사회 상태에 의해 도덕은 이미 명백히 실재하는 것이며 인간의 임무는 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도덕은 그 층위가 나뉜다. 이를 원으로 도식화했을 때 도덕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잘 변하지 않는 사회 상태의 특징에 기반을 두어 마찬가지로 잘 변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도덕이 바깥쪽에 위치할수록 쉽게 변하는 사회 상태의 특징에 기반을 두어 쉽게 변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편 윤리는 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도덕이다.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사회가 형성된 이래로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사실, 인간 종이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에 기반한다. 그로부터 나타난 살인 하지 말라와 같은 도덕 역시 지금까지 불변한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에 상당히 근거하여 형성되었기에 사실상 절대적인 것처럼 보여 보편 윤리로 불린다. 반면 음식을 다 먹어야 한다든가 존댓말을 써야 한다와 같은 도덕은 문화권이나 국가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나라에서는 음식을 조금 남기는 것이 예의이며 존댓말의 중요도 역시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나라도 있다. 이러한 도덕은 문화나 형식적 전통에 기반하여 국가에 따라 쉽게 달라지기 때문에 원의 바깥쪽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의 도덕 역시 층위를 나눠볼 수 있다. 자연 상태를 사회의 극한과 같이 바라보았을 때 역시 쉽게 바뀌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다. 이때 쉽게 바뀌는 것은 그때그때의 감정이나 욕구, 경험이며 이에 기반한 의지 역시 가변성이 강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의지에서 발생한 행동 규칙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어서 도덕이라고 부르기에도 마땅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보존의 욕구, 번식의 욕구와 같이 인간 본성과 직결되어 있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의지나 인생 전반에서 경험적으로 쌓아 올린 가치관으로부터 나타난 의지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나타난 행동 규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편 윤리와 맞닿아있을 것이며 사회 형성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도덕 역시 역시 자기 보존의 의지에서 파생된 사회 형성의 의지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자연 상태의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원의 중심부에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 단순한 행동 규칙과 도덕을 무엇으로 구분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이를 정의의 문제로 구분하고자 한다. 도덕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다만 우리의 행동 규칙에 이름을 붙인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많은 행동 규칙들 역시 우리가 무엇을 도덕으로 부를지 선택하면 될 일이다. 이때 자연 상태의 인간이라면 그 기준이 자의적이어도 상관없겠으나 사회에서 모든 기준이 자의적이면 다소 혼란이 생길 수 있다. 이때 기준은 도덕의 내용을 정하는 사회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미 정해진 행동 규칙의 내용들 중 무엇을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으로 보고 사람들 사이의 도덕으로 볼 지를 가르는 기준이다. 이때 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가능성에 착안하여 이 역시 사회 상태를 통해 바라볼 수 있다.
모든 의지로부터 나온 행동 규칙을 도덕이라고 정의는 할 수 있겠으나 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마치 칸트의 정언명령에서 아무런 논리적 모순은 없으나 도덕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심되는 명제들(아침에는 왼쪽 신발부터 신어야 한다와 같은 것은 정언 명령에도, 사회 상태에 비추어봐도 문제가 있는 명제는 아니지만 이를 도덕으로 정의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과 같다. 이를 구분할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사회 상태를 도입하여 도덕을 사회 유지의 수단으로 바라보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정합적이나 의미는 없어 보이는 명제들을 전부 도덕으로 규정하고 당위성을 부여한다면 직관적으로 혼란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으로 생긴 불만이나 불안 요소는 장기적으로 사회 유지에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정합적인 동시에 사람들에게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널리 시행될 때 도움이 되는 명제를 선별하여 이를 도덕으로 정의하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도덕과 행동 규칙을 나눌 절대적인 조건은 여전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둘을 가를 수 있는 기준은 도입할 수 있다.
또한 법과 제도 역시 대전제인 도덕에 합치되어야 하므로 마찬가지로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어 500년 전 조선의 사회 상태를 비추어 보았을 때, 조선에서는 군주정이 옹호되는 것이 합리적이다. 부족 단위가 되기에는 그 경제와 영토, 문화 수준이 너무 거대하지만 민주주의 사회가 되기에는 또 부족하다. 국민의 교육 수준 역시 조선의 민주주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시행하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 대신 직관적이고 감각적이며 단기적인 불합리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므로 차라리 강력한 군주가 통치하여 국가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군주정이 나아 보일 수 있다. 반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전제 군주정을 시행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군주정은 국민의 수준이 낮을 때는 차라리 효율적인 것으로 선택될 수 있으나 어느 정도 이상으로 국민들이 교육받은 사회에서는 오히려 비효율적인 체제가 된다. 한 명의 독단적 결정보다는 다수의 논의를 거친 결정이 안전할 것이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보다 의견이 역동적으로 제시되어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므로 사회 상태가 변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500년 전 조선과는 다른 도덕, 법,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반면 사회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 즉 독단적이고 도덕이 사회에 선행하여 나타난 사회는 유지되기 어렵다. 또한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이더라도 최선이 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이민족을 극도로 탄압한 아시리아는 그 강력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허망하게 멸망하였다. 반면 포용 정책을 펼친 페르시아는 오래도록 번영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민족 역시 정복 후에는 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과하게 탄압하여 사회의 혼란을 초래한 것이다. 또한 전한과 후한 사이의 신나라는 관직에 있는 자들은 재물에 관심을 갖지 말고 오로지 봉사할 생각만 해야 한다고 하여 관료들의 봉급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등 현실적인 경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책으로 순식간에 멸망해 버렸다. 이러한 국가들은 빠르게 멸망했지만 비교적 오랫동안 유지된 국가도 있다. 원나라는 민족에 따라 계급을 나누어 한족을 핍박했음에도 상당히 번영하였다. 그리고 원나라는 한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원나라 역시 다른 번영한 제국들처럼 보다 포용적인 정책을 펼쳤다면 운명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처럼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가장 올바른 도덕을 이끌어 내야 한다. 하지만 사회 상태라는 개념이 도입되며 더 근본적인 도덕의 발생 이유인 의지와의 연결이 약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 이유는 사회는 자연 상태에 의해 너무나 거시적이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자신의 의지에 따른 행동을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으므로 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규칙 또는 도덕을 정하여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 개인이 사회 상태를 스스로 분석하여 어떤 도덕이 가장 알맞은지를 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며 마치 건강검진을 우리 스스로 하지 않고 의사가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의지는 가지고 있으나 도덕의 내용을 스스로 완벽히 정하기는 쉽지 않아 마치 정해진 도덕에 휘둘리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의지로부터 도덕이 나오는 것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으로부터 도덕이 나온다는 것이나 막상 우리가 사회에서 느끼는 것은 주체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와 같은 혼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단순히 의지로부터 도덕이 직결되는 상태는 실제로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자연 상태에서이다. 이곳에서는 다른 어떠한 변수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의지로부터 도덕이 즉시 도출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도덕은 의지로부터 바로 도출되는 것이 이 정도로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규모와 복잡성이 일개 개인적 상태일 때보다는 월등히 커져 이것이 눈에 띄게 보이지 않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이는 근본 원칙과 현재 상태를 혼동하여 나타난 혼란이다. 적어도 현재 상태에서는 우리는 사회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닌 어렵기 때문에 편의상 이를 정부나 정치인, 전문가들에게 맡기고자 한 것뿐이다. 즉 이 역시 사실은 우리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정치인에게 맡겨야만 한다는 의무를 짊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회 유지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인정한 규칙이다. 즉 이는 우리의 선택이며 이것이 사회 유지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타난 또 다른 규칙일지도 모른다. 각자가 사회 상태를 해석하여 도덕의 내용이 무분별하게 양산된다면 그것 역시 오히려 사회에 혼란을 줄 것이므로 주된 도덕의 내용은 사회 전반이 정하며 일반 시민은 이에 따르도록 가르치고 법을 제정하며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도덕의 제정을 사회와 정부에 일임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적어도 완벽한 국가나 정부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회를 유지시킨다는 대전제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만약 국가가 잘못된 도덕을 발표한다면 국민은 마땅히 이에 저항해야 한다. 평상시에는 가르침을 받는 대로, 또 그것이 국민 개인이 생각하기에도 타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에 따르지만 사회 유지에 방해되는 도덕이 국가에 의해 나오게 되었다고 판단한 국민은 대전제를 위하여 반대되는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 원칙은 어디까지나 모든 것은 사회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현재는 비록 어느 정도 사회 상태의 분석과 도덕 내용의 발견 및 교육을 국가가 담당하고 있으나 이는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즉 도덕을 정부가 정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우리의 주체성이 약화된 것이 아닌 사회 상태에 따라 바람직한 역할 분배를 사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가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현재의 사회 상태에 의한 명령으로써 앞서 본 바-국가가 어느 정도 사회 상태의 분석과 도덕의 제정에 관여하고 국민은 이를 비판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가 성립되는 것이다. 만일 모든 개인의 수준이 극도로 높아져 단독으로 사회 상태를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다면 국가가 도덕을 가르칠 필요가 전혀 없어질 것이다. 단지 그 도덕에 따르지 않는 인간을 관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의 수준이 처참해 무조건적으로 틀린 말만 하고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모든 국민에게 완벽히 존재하는 사회라면 그 수준을 올리기 위한 정책은 차치하고 적어도 도덕의 제정과 교육을 국가가 전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지금 현재 상태에서는 앞서 말한 두 극단적 사례의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므로, 모든 것은 정부가 전담하는 것도, 국민이 알아서 판단하는 것도 아닌 규칙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방법론과 같은 것이 해결책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은 사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주장을 보고 사회가 독단적으로 도덕을 제정하고 이것이 사회 상태에 의하였을 때 옳다거나 정부나 지도자가 자신의 이념과 주장을 진리로 설파할 수 있지 않겠냐는 우려를 할 수 있다. 사회가 도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일견 굉장히 위험한 생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도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회 상태이지, 사회의 선택이 아니다. 독재정이 들어서 현재 사회 상태는 국민들이 도덕에 대해 일절 언급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정부만이 이를 독점해야 한다고 선언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사회 상태의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국가가 왜곡하더라도 이는 이론의 문제가 아닌 남용의 문제이다. 만약 그런 정부가 21세기 현대에 있다면 사회에 큰 혼란이 일어나며 지극히 틀린 주장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사회 상태에 의하여 사회 상태를 분석하는 정부의 형태와 권한이 달라질 수는 있으나 이는 정부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구체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사회 상태를 분석하여 완벽한 도덕을 발견할 수 있는지 그 방법론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다. 다만 이 부분은 어느 정도 불가지론으로 남겨둘 여지가 있다. 개인의 의지 실현을 위한 변수는 얼마 없기 때문에 자연 상태의 인간이라면 충분히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도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대해진 사회에서 인간들의 지적 수준으로 과연 가장 이상적인 도덕을 찾아낼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도덕을 찾기 위해 사회 상태를 분석하는 것은 그 규모와 복잡성을 고려했을 때 인간 수준이 극도로 높아지지 않는 이상 완벽한 도덕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분석하여 노력함으로써 이상적인 도덕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며 그러지 않는 것보다 사회의 영속에 더 기여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사회가 혼란해지는지, 안정되어 가는지로 증명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한계 역시 사회 상태에 편입됨으로써 이로부터 표현의 자유와 같은 가치가 도출된다면 더 나은 이상 도덕의 발견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본 글은 이전에 다소 모호하게 남아있던 개념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해설하였다. 이전 글들에 나왔던 의지와 사회 상태의 구체적인 정의와 그것들의 관계를 설명하고 오해될 수 있는 부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앞선 논의들을 바탕으로 현재의 도덕이 인간의 의지, 특히 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의지에 필연적으로 연원을 두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해당 사회의 총체적인 사회 상태에 의해 가장 합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형태로 정의된다는 점을 해명하였다. 이는 초월적이거나 불변하는 보편 윤리를 상정하는 대신, 현실에 발 딛고 변화하는 사회의 맥락 속에서 도덕의 타당성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다소 기능적이고 궁극적으로는 상대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는 글이지만 형이상학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도덕을 설명하고자 한 의도는 어느 정도 글에 담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각자의 근본적인 가치관 차이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문제들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