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태교
평소 생각과 고민이 많은 편이지만 인생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은 생각보다 큰 고민 없이 지나왔다. 멋모를 때 해야 결혼도 출산도 한다는데 내가 딱 그러했다. 결혼도 함께 여행하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로 결정했고 출산도 아이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낳았다. 물론 생각만큼 금방 아이가 찾아오진 않았지만.. 그 흔한 결혼서약서도 생각지 못했던 나로서는 결혼과 출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가상의 시나리오를 짜보는 사람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그랬던 내 인생에서 가장 생각이 많고 머릿속에 복잡했던 때를 꼽으라면 바로 둘째를 임신했을 때이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오랫동안 고민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둘째를 낳느냐, 안 낳느냐 일 텐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할 기회마저 날렸다. 겁도 없이 달려든 첫째 육아의 힘듦은 행복을 압도하는 날이 많았고 나에게 육아휴직은 행복하지만 고되고, 암울하지만 찬란했다. 아이를 돌보며 힘든 몸도 몸이었지만 아이를 낳기 전부터 방황하던 나의 정신은 더욱 비참해졌다.
출산과 육아는 '나는 왜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게 없을까, 왜 취미도 없고 관심사도 딱히 없을까, 나는 대체 좋아하는 게 뭘까.'라는 고민의 정점을 찍게 해 주었다. 제 몸도 못 가누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내 생각만 하기 바빴다. 첫째 육아휴직으로 최대 기간인 2년을 다 쓰겠다 결심했던 것도 마땅히 아이 맡길 곳이 없기도 했거니와 모성애나 희생정신 때문이 아니었다.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만큼 복직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도무지 사회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뭐라도 하고 복귀해야 하는데.. 뭐라도 이루고 가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컸다.
하루가 멀다 하고 땅굴을 팠고, 너덜너덜해진 정신과 가족과의 관계 악화도 경험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던 와중에 '뭐라도 해야지'에서 그 '뭐'를 한 가지 이루게 되었는데 정부의 부동산 정책으로 한창 이슈가 됐던 2020년 여름. 바로 집 장만이라는 꽤 큰일이었다.
그래서일까. 기쁨에 너무 취했던 것 같다. 새 집에 들어가기 전 복직도 준비할 겸 회사 근처에서 2년을 살기로 결정하고 이사를 준비하던 때. 출산 후 대면 대면했던 남편과도 서로 다독이며 사이를 조금 회복해버렸더니 말도 안 되게 이사 가기 직전 단 한 번의 그날이 둘째라는 벅찬 선물을 안겨주었다.
첫째가 돌 지나고 겨우 지구인이 되어 나 역시 안드로메다로부터 벗어나나 했는데 예정에도 없던 둘째가 찾아왔다. 얼마나 예정에 없었냐면 주위 사람들에게 둘째 생기는 순간 남편과는 헤어진다는 얘기를 밥 먹듯 했고, 복직을 하려고 친정을 벗어나 회사 근처로 이사했으며, 아이가 쓰던 물건과 옷들을 모두 지인에게 나누어주었다. 8월 말 이사를 했고 그동안 함께 운동한 사람들과 자축하며 술을 마셨다. 생리 시기인데 안 해서 다행이라며 좋아했더니만.. 이틀 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떠버렸다. 난 사실 테스트를 할 생각도 없었다. 자꾸 졸려하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급히 사들고 왔기에 '오버하지 마. 말도 안 돼'라며 해본 것이었다. 한동안 민망해서 사람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이렇게 큰 고민들이 턱턱 사라지니 괜히 더 쓸데없는 고민을 많이 하는 건가.. 누군가는 부럽다고도 하겠다. 둘째 고민을 한방에 날리고, 아이가 나에게 알아서 오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자 선물인가. 하지만 첫째였다면 모를까.. 둘째는 없다고 못 박은 나였는데 감사한 마음만 가지고 받아들이기에는 내가 나를 외면하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이라고 감정까지 조작하는 건 오만한 일이다. 둘째는 처음부터 다시 어떻게 키우지, 첫째의 마음은 어떻게 보살펴줘야 하지, 회사는 어쩌지.. 돌아갈 수 있을까? 육아휴직 2년도 긴데.. 3년..? 설마 4년..? 회사에 대한 걱정도 적지 않게 커져갔다.
이럴 땐 오히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삶의 중심축이 실제로는 아이일지라도 또 다른 굵은 축을 들여오는 것이다. 마치 그게 삶의 중심인 양. 자신이 갖고 있는 취미일 수도 있고, 일일 수도 있고, 공부일 수도 있겠다. 딱히 취미랄 게 없던 나에게 그 축은 바로 글이었고 뭐라도 쓰는 것이었다. 뱃속에 둘째가 생긴 걸 알게 된 후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태교 글쓰기랍시고 글을 썼지만 아이가 들으면 좋을 법한 글보단 듣지 말았으면 하는 얘기가 많았다. 바로 나의 약하고 어두운 모습들이었다. 내 삶 속에 켜켜이 묻어두었던, 머릿속에만 휘몰아치고 답을 내지 못했던 숱한 질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도대체 나란 사람은 누구인가?
주체적으로 사는 삶이란 어떤 걸까?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글을 쓴다고 해서 답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결과가 아닌 과정을 즐기게 되었고 후련함도 맛보았다. 태교를 하기 위해 글을 쓴 게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해 태교를 했다. 회사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걱정은 어느 순간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중요하지 않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하지만 현재 할 수 있는 만큼만 생각하기로 했다.
사람에겐 인정 욕구라는 게 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인정해줘야 다른 사람도 인정할 수 있다. 비록 옹졸해 보이고 나약한 모습이라도 그 마음을 헤아려준다면 언젠가 반드시 보답해올 것이다. 내 삶의 중심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면 그 속에서 헤매며 스스로를 얽매지 말고 인정하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걸 들여와서 공존하게 하면 된다. 외면하지 않고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그렇게 한 발씩 앞으로 나가면 그 과정 속에서 나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행동이 다듬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