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무력증
-무엇을 목표로 하고 계신가요?
차마 입에서 식이장애를 고치고 싶어 왔다는 말은 나오지 못했다. 그저 건강한 체중 감량을 목표로 하고 싶다 웅얼거렸다. 트레이너 선생님의 긍정적인 끄덕임과 함께 본격적인 첫 수업에 들어갔다. 오늘은 첫날이라 가장 기본적인 운동을 할 것이라 안내해 주셨다.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기본, 수없이 해온 스쿼트. 다이어트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스쿼트가 첫 운동이었다. 내가 20년 만에 헬스장을 왔지만 이것 하나 못해낼까. 챌린지라며 100개, 200개는 거뜬히 해내던 지난 날들. 첫 아이를 낳고 일주일 만에 스쿼트를 하는 바람에 지금도 무리하면 욱신거리는 무릎. 이 질긴 인연을 회상하며 전신 거울과 트레이너 선생님 앞에서 그동안 해왔던 대로 스쿼트 동작을 서너 개 해 보였다. 치솟는 내 자신감과 달리 갸웃거리는 선생님의 고갯짓과 함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동안 발과 발 사이를 지나치게 좁게 두었던 것이다. 게다가 엉덩이는 지나치게 뒤로 빼었기에 무릎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갔다. 아, 무릎과 허리가 아픈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그러니까... 아주 엉망진창인 스쿼트를 해온 것이다. 결국 제대로 서 있는 자세부터 배워 아주 천천히 해나갔다. 세상에, 구령에 맞추어 고작 15개를 한 것뿐인데 벌써 다리가 달달달 떨린다. 허벅지를 부여잡고 간신히 섰다. 오늘은 가볍게 3세트만 한다고 하셨다. 선생님, 저 어떻게 집에 가죠. 하지만 내향인답게 속으로만 부르짖었다.
동작을 제대로 하니 상체가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올 때 아랫배에 힘을 콱 주어야만 했다. 하필 탄탄한 운동복 덕분에 뱃살이 티 나게 불룩해 보였다.
-아랫배! 아랫배, 힘! 힘주세요!
선생님의 독촉에 없는 힘을 쥐어짜 배에 몰빵 했는데... 순간 뱃속이 꿀렁거리며 아주 쓴 물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연속되는 동작에서도 배에 조금만 힘을 주면 토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직감으로 알았다. 이건 운동을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리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 식이장애의 영향으로 생긴 위 무력증 때문이었다. 내 몸은 오랜 기간 동안 구토로 단련된 몸이다.
언젠가부터 배에 힘을 주는 동작이 고역이었다. 요가를 할 때 특히 그러한 자세가 많았는데 얼마 전부터는 생활 속에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뱃속이 뒤틀리면서 무언가 식도를 타고 넘어올 것 같아 동작 자체를 수행하지 못하곤 했다. 단순히 컨디션 난조 때문인 줄 알았다.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더니 오늘도 문제를 일으켰다.
폭식을 하고 토하는 생활을 긴 시간 해왔다. 한때는 매일 같이 토했고, 어느 때는 달에 한두 번 토했다. 폭식만으로도 위장엔 커다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구토가 반복되면 나처럼 위 무력증이 생긴다. 위장의 연동운동이 희미해져 조금만 과식을 해도 자주 체한다. 여기엔 소화제도 소용이 없다. 결국 음식물을 게워내야 해결이 된다. 악순환이다. 미칠 노릇이다. 자꾸만 넘어오는 쓴 물을 삼키며 두 번 다시 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식이장애 환자에게 ‘두 번 다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몇 가지 기본 운동을 더 배우고 수업을 마무리했다. 근력 운동 후엔 유산소 운동을 해야 체중 감량이 잘 된다고 ‘어디서’ 들었다. 트레이너 선생님께서도 유산소를 하고 가라며 권하셨다. 러닝 머신의 작동법을 간단히 배우고 5.5의 속도로 열심히 걸었다.
밝은 댄스 음악의 속도에 맞추어 걷다 보니 아주 오랜만에 음식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우주처럼 넓어졌고 그 안으로 궁금한 것들이 마구마구 생겨났다. 기구 운동은 언제쯤 배울 수 있을까? 나도 ‘천국의 계단’을 30분 동안 탈 수 있을까? 내일 헬스장 올 땐 텀블러와 수건을 꼭 챙겨야겠다! 가자마자 운동복을 빨면 되겠지? 다음번 수업 땐 어떤 운동을 배우게 될까?...
늘 ‘무얼 먹을까’라는 생각을 안고 살았다. 지나친 책임감으로 살아온 나는 그 뒤로 피어나는 모든 감정을 먹어서 해소했고 치유했으며, 달래 왔다. 살이 쪘을 때나 빠졌을 때나 음식 생각은 늘 두뇌 안에 들어차 다른 모든 것을 배척했다.
여전히 전신거울에 비친 나는 너무도 꼴 보기 싫었다. 아랫배는 튀어나오고 등살은 스포츠 브라 위아래로 밀려 나왔다. 얼굴은 땀에 젖어 상기되어 붉어져 있었고 머리는 내가 살아온 삶처럼 헝클어졌다. 거울을 애써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지만 헬스장엔 어찌 이리 커다란 전신 거울이 수없이 많을까. 아무리 피해도 결국 거울 앞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건강해지기 위해 이곳에 온 거야. 정신승리를 하는 수밖에. 이런 나를 누가 욕해. 자신을 위한 합리화는 건강에 아주 좋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오늘은 엄청 맛있는 점심밥을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