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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이루고 있는 것

인바디 측정

by 김지현

첫 PT 수업 날이 되었다. 시간 많은 백수는 오전으로 일정을 잡았다. 무엇이 필요한지 몰라서 일단 실내용 운동화 하나만 덩그러니 챙겨 집을 나섰다. 정확히 한 시간 뒤, 물병도, 수건도 가져오지 않은 것을 나는 지나치게 후회했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남자일 것이란 예상을 깨고 여자 선생님이 나를 맞이해 주셨다. 커다란 박스티를 입었지만 동그란 어깨의 근육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선생님의 근육보다 더욱 부러운 것은 헬스장이라는 공간을 나긋하게 누비며 다니는 트레이너 특유의 여유로움이었다. 나는 진실로 쫄아있었다. 쿵작거리는 것이 음악 소리인지, 내 심장 소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요가를 해온 나는 요가복을 입고 가도 무리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대충 걸치고 갔다. 검은색 조거 팬츠에 아주 환한 딸기우유 색 반팔티였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니 이렇게 밝은 옷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헬스장을 비추는 딸기우유 색 반팔티에서는 번쩍번쩍 빛이 났다. 심지어 최근 들어 찐 살은 상체에 집중된 바람에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당장 로켓배송으로 헐렁한 검은색 티를 꼭 사리라 마음먹었다.


첫 수업이라 바로 운동을 시작하지 않고 인바디를 측정했다. 마지막으로 재어본 체중은 70kg이었다. 그때 나는, 이제 먹고 싶은 걸 원 없이 먹어보았으니 식이장애가 고쳐질 것이라 믿었다. 큰 착각이었다. 그렇게 먹어도 먹고 싶은 것은 또 생각났고, 소화를 시키지 못해 토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애초에 안 먹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식욕이었다.


아침 공복 체중이 70이었으니 조금 더 나가겠지. 사실 불안했다. 보나 마나 체지방량과 체중은 높고 근 골격량은 낮은, 움푹 파인 모양의 그래프가 나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확한 몸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차가운 막대를 붙잡고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내 몸의 많은 것들이 수치화되어 나타났다. 역시 예상과 비슷한 모양의 그래프. 다행히 꾸준한 요가로 근 골격량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체중과 체지방량은 임신 막달 몸무게 이후 최대치였다. 이게 홀몸으로도 가능한 몸무게였구나. 원래 하체가 통통한 하체비만형 체형이었으나 열심히 먹어댄 결과, 상체까지 균형 있게 살이 쪄 ‘전신 비만형’으로 바뀌고 말았다. 심지어 인바디 출력물은 상체가 하체보다 더 튼튼하다며 붉은 화살표까지 그려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결과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 마구 먹었을 것이다. 이렇게 만든 건 바로 나야. 정말 수치스러워. 그리고 소화시키지 못해 다시 토했겠지. 하지만 ‘살이 찐 내 몸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식이장애 회복에 있어 너무나도 중요했고, 알고 있다.

-나는 70kg이야. 부지런히 먹었지.

-온몸에 골고루 살이 쪄 이젠 자주 입는 바지도 맞지 않아.

-그래도 이건 내 몸이야.

-싫든 좋든 이게 내 몸인 걸 어쩔 거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몸을 바로 내가 만들었다’며 자기혐오의 동굴로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감정을 삭제하고, 담담하게 내 몸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부지런히 했다. 위의 문구를 반복해서 혼잣말을 하기도, 속으로 되뇌며 호흡을 고르고 명상을 하기도, 가벼운 산책을 하면서 떠올리기도 했다.


내 몸은 늘 미웠다. 단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예쁜 내 몸은 허공 어딘가를 떠돌고 있어. 내가 최선의 노력만 한다면 자고 일어났을 때 그 몸으로 바뀌어 있을 거야. 이 몸은, 지금 이 몸은... 내 것이 아니야.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내 몸이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평온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까. 몸과 마음이 분리되었다는 사실은 식이장애를 발생시키기에 충분한 요건이 된다. 살이 찔 까봐 토하고 내 몸이 싫어 토했다. 완벽한 몸을 찾아 마음이 허공을 바라보는 사이에 진짜 내 몸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왜 진작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그런데 놀라운 점은 맘껏 먹어 살이 쪄보니 우려했던 대로 내게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요즘 세상에 빅사이즈 옷들은 너무나 많았고 잘만 입으면 이 모든 살들을 몰래 숨길 수도 있었다. 다만, 내가 생활하기에 좀 불편하긴 했다. 적어도 내 몸에게는 자기 합리화가 필요했다.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나만 나에게 삿대질을 해대고 있었다.


-이 정도는 좀 쪄도 괜찮아.

-내가 연예인 될 것도 아닌데 무리할 필요 없잖아?

-오늘은 이런 운동만으로도 충분해.

-맛있게 먹었으니 된 거야.


아쉽게도 멀리 돌아왔다. 살이 찐 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최소 9kg은 빼야 건강에 좋다는 것, 나는 이제 날씬한 몸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원한다는 것. 잊고 있었던 나의 작은 우주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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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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