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폭풍이 휘몰아친 후

다시,

by 김지현

새로운 한 주. 이번 주는 2회의 PT 수업이 있을 예정이다. 카톡 메시지로 트레이너 선생님과 서로의 일정을 조율하는 중이었다. 백수가 된 나는 아무 때나 상관없긴 했지만 되도록 오전 수업을 배정받는 것이 심적으로 훨씬 편했다. 오전 일찍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고 느끼는 성취감으로 남은 하루를 건강하게 보낼 수 있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수요일과 금요일 오전이 어떻냐 물으셨고, 나는 마침 딱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중간쯤 왔으니 체중도 겸사겸사 체크를 해볼게요.


아! 헬스장 등록하기 며칠 전에 체중을 재어보고 절망했다. 그리고 PT 수업 첫날 인바디를 재어보며 내 현실을 선명하게 자각했다. 그 뒤론 체중계를 아예 창고에 집어넣어 버렸다. 식이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에게 체중 측정은 맹독이다. 1g의 증가와 감소에 일희일비 해선 안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누가 모를까. 하지만 습관적으로 굳어진 사고방식은 낮은 체중계의 숫자가 가장 쓸모 있는 삶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알면서, 다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짧은 답문을 보내고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열심히 수업을 따라갔다. 다음날이면 꼭 헬스장에 나가 배웠던 동작을 하나하나 복습했다. 몸의 어느 부위에 힘이 가해지는지 기억해 내며, 자세를 바르게 하려 애쓰고 신중하게 운동했다. 나를 포기하고 살던 예전과 달리 군것질도 건강하게 바꾸었다. 툭하면 아이스크림이나 젤리를 사던 나였는데 지금은 미리 얼려놓은 딸기나 블루베리를 먹는다. 예전엔 이걸 무슨 맛으로 먹나,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무첨가 두유도 이젠 박스로 쟁여놓고 하나씩 마신다.


물론 과자나 배달 음식을 안 먹는 것은 아니다. 생리 주기상 식욕이 폭발하는 배란기에는 나조차도 어쩌질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아작아작 먹으며 토할 구상을 하던 예전과 달리, 맛있게 먹고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적당히 소화시키는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이것은 체중이 줄어든 것보다 훨씬 소중한 성과였다. 음식은 나에게 영양분을 주고 때론 맛으로 즐거움을 주는 존재야.

음식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삶

맛도 모른 채 마구 먹고 토해버리는 삶

역류성 식도염을 겪지 않는 삶

세 끼니를 적당히 먹고 잠드는 평범한 삶


그런 건강한 삶.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PT 수업이 중간 정도 온 시점에서 체중을 측정한다니, 뭔가 평가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험을 보고 점수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점수에 따라 내가 들인 정성과 들인 노력의 여하가 결정된다. 아무리 건강한 생활을 했더라도 체중이 1g도 줄지 않으면 그건 헛수고라는 뜻일까. PT 수업을 등록한 첫날, 운동의 이유를 물으셨을 때 ‘체중 조절’이라고 대답하지 말걸. 그냥 솔직하게 건강히 살고 싶어서 왔다고 할걸.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결국 창고에서 체중계를 꺼냈다. 겉옷을 벗고 아무도 모르게 체중계 위에 올라섰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이 아니라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심정이었다. 마구 올라가는 숫자가 정확히 멈추는 그 순간 눈을 떴다. 체중계 화면에 보인 숫자는 내가 열흘 전에 재었던 것보다 딱 400g 줄어 있었다.


400g? 고작? 그것밖에? 예전엔 한 끼만 굶어도 500g은 쉽게 빠졌다. 아니, 화장실만 다녀와도 빠질 때가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건강하게 먹고 밤늦은 시간 배달 음식도 끊었는데, 야채와 단백질도 잘 챙겨 먹고 무엇보다 매일 운동을 열심히 하는데 겨우 400g이 빠졌다고? 놀라울 정도로 짜증이 났다.


체중계는 다시 정리해서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넌 다시 보지 말자, 하는 마음으로. 역시. 체중을 재어보는 게 아니었어. 그때부터 급격히 솟아오른 스트레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 전 공복인 상태였다. 좀 전엔 단지 가벼운 허기만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구를 집어삼킬 만한 식욕이 치솟았다. 모든 걸 먹어버리겠어. 밥도, 감자칩도, 아이스크림도, 내 마음까지도.


가족들과 정상적인 것처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몰래 편의점으로 가서 그동안 멀리했던 초코파이며 과자를 마구 사기 시작했다. 이걸 다 먹어버릴 거야. 아까 체중계에서 본 두 자리의 숫자가 이성의 끈을 잘라내고 있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미친 듯이 먹었다. 익숙했다. 맛도 모르고 먹었던 예전처럼 입속에 밀어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달콤하다, 부드럽다, 쫄깃하다, 풍미가 좋다 등등의 생각은 나지 않는다. 폭식하는 동안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가득하다.


‘빵, 빵, 빵, 빵, 빵’

‘과자, 과자, 과자’


사실 생각이랄 게 딱히 없다. 그저 동어반복만 떠올릴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씹고 삼켰다.


배가 지나치게 부르고, 허망했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포장 봉지를 말끔히 치웠다. 내가 한 짓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장실 변기 앞으로 갔다. 입속에 손가락을 넣고 토해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한 것이라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해온 세월이 있으니 금세 익숙해졌다. 손을 씻고 바로 양치를 해버렸다. 화장실에서 나가니 싱크대에 가족들이 먹고 치운 저녁 설거지가 산더미다. 꼭 내 마음 같다.


열흘째 나를 놓지 않고 잘 버텼지만 오늘 다시, 무너졌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붙잡고 싶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잠시 쉬면서 오늘의 일을 통해 앞으로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지 생각했다.


-집안일을 할 때마다 듣던 운동 관련 유튜브 채널을 끊을 것. 묘하게 강박이 생김.

-야채에 방울토마토를 더해 즐거움을 느낄 것. 억지로 먹으니 힘듦.

-유튜브 시청과 산책 이외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찾을 것.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음.

그리고... 트레이너 선생님께 연락할 것.



-선생님, 죄송하지만 체중은 마지막 수업쯤 재면 안될까요? 식이장애 때문에 체중을 재는 것에 부담을 느껴요.


선생님께서는 당연히 괜찮다며, 마지막 인바디 체크로 마무리하자고 하셨다. 마음이 개운해졌다. 창고에 넣어 둔 체중계는 당연히 당분간 꺼내지 않을 예정이다. 설사 5kg가 어제 찌고 오늘 빠져도, 혹은 그 반대라도 내가 변하는 건 없는데. 흔들리는 건 오직 내 마음뿐이다. 안정될 때까지 체중을 재는 것은 멀리 해야겠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7화나를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