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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ip Lee Jun 02. 2021

'찾기'에서 '되기'로...

수십년 동안 아버지를 찾았지만, 이제는

“자, 모두 눈을 감아 볼까요.”     


으... 빌어 먹을 그 시간이다. 지금도 치를 떨게 하는 가정환경조사 시간. 평온하던 가슴이 뛰고, 볼이 발그스레해진다. 학기 초의 이 시간만 되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     


“집에 어머니 한 분만 계시는 학생 손 들어볼까요?”     


옆에 앉은 짝에게 들킬세라 조심스레 손을 든다. 50분 같던 5분이 끝나고, 눈을 떴다. 휴. 올해도 이렇게 넘겼다는 안도감에 숨을 뱉는다.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아홉 살 때의 일이다. 40대 초반의 아빠를 하늘나라로 돌려보낸 건 암이었다. 이른 더위가 찾아온 6월, 장례식의 기억은 별로 없다. 모두가 슬퍼했던 침울한 분위기와 그때 마셨던 병 사이다의 청량함은 어렴풋이 남아 있다.     


아버지가 없다는 건 나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한 번의 교통사고가 아니라 사고 이후 지루하게 낫지 않는 후유증과 같았다. “너의 아빠 뭐하시니?”라는 친구들의 질문에 “응. 회사 다니셔.”라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그 아픔은 커갈수록 짙어졌다. 내 성격도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변했다. 나의 가정환경을 숨겨야 했기에. 그 아픔을 잊기 위해 여러 가지에 빠졌다. 종교에 빠지고, 책에 빠지고, 영화에 빠졌다. 유익이 없진 않았다. 무언가에 몰두하는 순간에는 아픔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아들이다. 아들이 올해 열 살이다. 나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나이보다 한 살 더 먹은 40대 중반이다. 아버지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옛 사진을 보며 그때를 추억할 뿐. 다행히 아빠가 나를 안아주셨던 따스함이 남아 있다. 그 따스함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사십 여년, 아버지를 찾으며 살아왔다.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한 영화도 숱하게 보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그린 책도 찾아 읽었다. 그래도 아버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없는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잘못된 명제였다. 솔직히 어떻게 아들을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 9살 이후엔 아빠의 기억이 아예 없으니까. 막막하기도 하다.

     

하지만 점점 커 가는 아들을 보며, 아빠의 심정이 어슴푸레 느껴진다. ‘수십 년 전, 아빠가 나를 바라볼 때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희미하게나마 아버지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 그와 함께 한 가지 퍼뜩 떠올랐다.


'이제 나는 아버지를 찾을 때는 지났구나. 내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선우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주는 것이다.'

     

아들은 더욱 커갈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지나, 언젠가는 사회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독립해 새로운 가정을 꾸릴 것이다. 아버지가 없었던 나는 나침반 없는 배와 같았다. 그래도 아들은 기댈 수 있는 아빠가 있다. 그 사실이 내게 위로가 된다. 더욱 책임감을 느낀다.     


“아버지란 일도 다른 사람은 못 하는 거죠.”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대사가 떠오른다. 다른 사람은 못 하는 아버지. 그 신성한 일을 맡은 지금. 아버지를 찾기 위해 수십 년 헤맸던 시절을 이젠 뒤로 하고, 한 가지 일에 집중하고 싶다.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는 것.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주다 보면, 나 역시 잃어버렸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조금이나마 되살아나지 않을까. 제발.     


ps. 아들과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쓰려면, ‘아버지’라는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 아버지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더듬는 것이 나와 내 아들에게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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