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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ip Lee Nov 24. 2021

"우리, 정말 많이 갔었다!"

여행이 우리 가족에게 주었던 것


“또 왜 들어와!”     


자려는데, 아들이 또 안방에 침입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라 익숙하다. 무서워서, 추워서, 배가 아파서... 침입 이유도 참 많다.     


대개 그냥 돌려보내지만, 이유가 타당하거나 죽어도 안 돌아가겠다는 아이의 의지가 너무 강력하면 항복한다(부모 아닌가). 셋이 자기엔 좁아서, 보통은 내가 선우 방에서 잔다. 침대도 좁고, 매트리스도 불편하다. 이거 완전 패전병 아닌가.     


‘가야 하나?’라는 마음으로 베개를 챙기려는데, 연이틀 선우 방에서 자서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효과일까. 아내가 “이번 한 번만이야”라고 으름장을 놓고 선우 방으로 간다.      


누우면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나이지만, 얼마 전 가족 여행으로 다녀온 단양 얘기를 꺼냈다. 선우도 여행이 재미있었는지 눈이 커지며 아쿠아리움에서 봤던 큰 물고기 이야기를 한다. 갑자기 봇물 터지듯 예전에 여행 다녀왔던 곳을 서로 읊기 시작했다.      


나 : 무주 기억나? 그때 무슨 동굴 갔었잖아.

선우 : 응. 거기서 치즈도 먹었잖아(기억력이 나보다 좋다).     


나 : 여름에 경주 간 것도 기억나?

선우 : 응. 숙소에 수영장 있어서 재미있었어(확실히 애들은 유적지보다 수영장이 기억에 남는구나).     


나 : 제주도 갔던 거 기억나?

선우 : 아니,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나(이럴 땐 좀 억울. 나름 돈 들이고 시간 들여 갔다 왔는데..)     


계속 이야기하니, 30분이 훌쩍 지났다.      


“우리, 정말 많이 갔었다!”     

선우의 이 말을 끝으로 부자의 급 여행토크는 마무리되었다. 다음날 가족과 여행 갔던 곳을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어보았다. 꽤 많았다. 공주, 부여, 서천, 당진, 경주, 담양, 여수/순천, 남해, 통영, 완주, 논산, 전주, 부안, 고창, 제주도... 거의 20곳 가까이 됐다. 해외도 있었다. 대만, 베트남. 결혼 10년 차이니까 1년에 두 곳은 다녀왔다. 가까운 곳은 당일치기도 많았고, 1박2일이나 2박3일로 다녀온 곳도 꽤 있었다.  

   

쭉 여행 갔던 곳을 살펴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특히 대전에서의 6년 반 동안 여행을 많이 다녔다.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였다. 팔자에도 없던 자영업을 덜컥 시작했다. 맨땅에 헤딩하듯 별 준비없이 했으니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몸도 힘들었지만, 마음과 정신이 피폐했었다. 주말도 없었다. 가족이 다 모여 식사하는 건 일주일에 한두 번 뿐이었다.     


그때 우리 가족의 숨통을 열어준 것은 여행이었다. 두세 달에 한 번씩은 나갔던 것 같다. 여행도 좋았지만, 어디로 갈지 결정하고, 가서 무엇을 할지, 가서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는 과정 또한 좋았다. 그 설렘으로 지난한 시간을 버티지 않았을까. 다녀와서는 사진을 보며 웃고, 여행의 추억을 곱씹고 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엔 어디 갈까? 고민하며 또 지루한 일상을 견뎠다.     


다시 한번 여행 갔던 곳을 살펴보았다. 많은 곳을 갔지만, 그곳의 유적지나 관광지는 기억에 별로 남지 않았다. 열심히 인터넷 찾아가며 꼭 먹어보리라 결심하고 찾아간 지역 맛집의 음식 이름과 맛도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어느 시점에 같은 곳을 다녀왔다는 것. 그 사실 한 가지만 확실히 기억난다. 소중한 경험을 누군가와 친밀하게 공유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여행이 주는 진정한 의미 아닐까.     

 

지금은 생활이 많이 안정되었다. 예전보다는 쉬는 시간이 늘어 여행이 그때처럼 고프지는(?) 않다. 물론, 여건이 되면 여행을 가겠지만, 이제는 여행이 고플 때, 그때의 사진을 볼 것 같다. 그때의 즐거움과 기쁜 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아울러 선우가 기억하는 여행의 순간들을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      


ps. 이렇게 쓰다 보니, 어디론가 가고 싶어졌다.     


“우리, 좋은 곳 더 많이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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