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유작 <4321>을 읽고
폴 오스터의 유작이라 할 수 있는 <4321>.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마치 두 개의 벽돌 같은 이 책과의 첫 만남 때 느낀 솔직한 심정이다. 분량도 상당하거니와 끊임없이 나오는 수많은 인명과 지명들 때문에 제대로 줄거리를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현대 미국 문학의 대가인 작가의 마지막 이야기는 과연 어떨까?’라는 호기심과 ‘이젠 이런 벽돌책을 읽어봐야지’라는 오기로 이 책을 읽어갔다.
주인공 퍼거슨의 할아버지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는 이민자로 1900년 록펠러라는 이름을 갖고 싶었지만, 그 이름을 잊어버려 ‘이키보드 퍼거슨’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퍼거슨 가의 이야기가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이때부터 이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할아버지의 손자 퍼거슨의 일대기가 기술되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 바로 한 가지가 아니라 네 갈래로 흩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이야기마다 퍼거슨의 삶은 다르게 펼쳐진다. 마치 요즘 SF 영화에 많이 등장하는 평행우주와 비슷하다. 각 우주에 똑같은 내가 사는 데,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떤 세계에선 퍼거슨의 아버지가 자신이 운영하던 상점에서 화재로 일찍 사망한다. 반면 다른 세계에선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한다. 어떤 세계에서의 어머니는 유명 사진가가 되어 전시회를 열지만, 다른 세계에선 사진 일을 영영 그만둔다. 어떤 세계에선 퍼거슨이 차 사고로 손가락 몇 개를 잃는다. 다른 세계에선 프린스턴 대학교의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콜롬비아 대학생 퍼거슨의 세계도 있다. 어떤 세계에선 여자친구였던 에이미가 다른 세계에선 의붓누나가 되기도 한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었고, 일이 한 가지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게 다를 수 있었다.” (1권 102쪽)
각각의 상황이 달라, 초반에는 읽기가 쉽지 않았다. 자꾸 읽어왔던 책의 앞부분을 훑어보고 다시 줄거리를 이어가야 했다. 그렇지만 퍼거슨의 각각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참 흥미로웠다. 퍼거슨의 삶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도 4개의 세계로 나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과 주위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구나.’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미국 1950~60년대의 실제 역사가 배경을 이룬다.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케네디 대통령 서거, 인종차별, 초창기 메이저리그...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와도 비슷하게 미국의 역동적인 역사를 퍼거슨의 눈으로 훑어보는 것 같다.
이 미로 같은 이야기는 마치 기관차처럼 돌진한다. 나도 중반 이후부터는 이 소설을 완벽하게 소화해야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이해되는 것은 이해되는 대로, 읽다가 잊어버린 것은 또 잊어버린 대로 읽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네 명의 퍼거슨의 이야기이지만, 결국은 한 명의 이야기로 읽혔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어느 한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서로 다른 모습이 이리저리 혼재해 있는 복잡함을 지닌...
다 읽고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4321>은 폴 오스터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었다. 태어난 뉴어크, 운동을 좋아했던 것(야구), 글쓰기, 컬럼비아 대학교, 부모님 이야기, 잠깐 살았던 프랑스 파리 등등 작가의 삶이 퍼거슨의 삶에 겹쳐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각 퍼거슨의 귀결이 글 쓰는 방향(소설가, 기자)으로 결정되는 것도 인상 깊었다. 퍼거슨은 폴 오스터의 분신이 아니었을까.
퍼거슨이 무엇보다 원했던 건 감각적인 대상과 무기력한 사물만 있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세상뿐 아니라,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숨은 거대하고 신비한, 보이지 않는 힘까지도 담고 있는 이야기를 쓰는 일이었다. (2권 11쪽)
이 소설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성장소설, 역사소설, 사회소설, 작가의 자전적 소설... 어떻게 표현해도 맞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하다. 방대하고 읽기도 불편한 이 소설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이야기’ 아닐까.
10대부터 20대 초반까지의 퍼거슨의 삶을 쭉 지켜보며 복잡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였고, 주위의 환경이 녹록지는 않았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삶을 묵묵히 걸어가는 퍼거슨.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던 것 같다. 때로는 안타깝기도, 때로는 응원하기도, 때로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었다. 퍼거슨이 겪은 이야기를 살펴보며 나도 그 이야기의 풍랑에 깊이 빠져든 것 같다.
작가의 인생이 버무려진 듯한 소설 <4321>. 이제 그의 집필은 끝났지만, 그가 남긴 책들은 아직도 우리를 초청한다.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빠져 들어보라고, 또 너만의 이야기를 묵묵히 살아보지 않겠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