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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ip Lee Apr 17. 2019

<뭔가 해보고 죽자고>

Book insight  #35 / <두 늙은 여자>

<두 늙은 여자(벨마 월리스 / 이봄)>

"그래, 사람들은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했어! 그들은 우리가 너무 늙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기지. 우리 역시 지난날 열심히 일했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잊어버렸어! 그래서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친구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말이야."    
 

처절한 외침입니다. 추운 겨울, 한 여인의 고백이지요. 여인에게 어떤 일이 닥친 걸까요? 그녀는 왜 이런 고백을 해야만 했을까요? 

    

그녀의 이름은 사. 75세의 늙은 여인이지요. 그녀의 곁에는 친구 칙디야크가 있습니다. 80세로 역시 나이가 많아요. 이들은 알래스카 극지방 유목민들입니다. 언제나 먹을 것을 찾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죠. 그런데, 지금 이들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와 칙디야크 둘 뿐입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요? 이들은 버림받았습니다.      


예전에 없었던 무시무시한 강추위가 찾아온 것이지요. 유목민들은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이들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냅니다. 족장이 대표로 말합니다.     


“우리는 나이든 사람들을 두고 가지 않을 수 없소.”     

나이가 많은 사와 칙디야크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입니다. 잘 걸을 수도 없는데, 사냥도 못하는데, 불도 잘 못 피우는데...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유목민들은 매몰차게 이들을 두고 떠난다는 겁니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마치 전래동화에 나오는 ‘고려장’처럼 나이든 사람을 두고 가는 게 이들의 풍습이었으니까요. 족장의 말에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지 못합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침묵할 뿐입니다. 결국 이들은 남겨졌습니다.     


뭔가 해보고 죽자고   

 

어찌할 수 없는 분노와 환멸 속에서 ‘사’는 뭔가 해 보고 죽자고 말했습니다. 평생을 같이 해 온 친구의 마음이 전해졌을까요?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칙디야크도 입을 뗍니다.     


“뭔가 해보고 죽자고.”     

이들은 떠난 자들을 막연히 기다리지 않았어요. 사와 칙디야크는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맨 처음 이들은 불을 피웠습니다. 나뭇가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쓰러진 미루나무에서 떼어낸 마른 이끼를 불 위에 던졌습니다. 가죽끈을 잘라내 올가미도 만들었지요. 누군가가 해 주었던 일을 이젠 이들이 직접 해야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나요? 올가미에 토끼가 잡혔습니다. 손도끼로 다람쥐도 잡았지요. 다행히 하루를 생존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들과 어른들로부터 배워온 지식과 기술이 하나둘 생각나기 시작했어요. 눈신발도 만들고, 얼음강도 건넙니다. 물고기도 잡습니다. 추위를 대비하기 위해 토끼털로 모자와 장갑도 만들죠.     


공동체가 떠난 후, 하루도 살아남기 어려운 매서운 추위 속에서 이들은 생존합니다. 하루, 이틀, 사흘....... 신기한 일도 생겼어요. 항상 지팡이가 필요했는데, 어느새 두 다리로만 걷고 있습니다. 물고기 저장소에는 먹을 물고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졸졸 따라다니며, 바로 곁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신(死神)도 이젠 떠났을 겁니다.     

족장도 없고 든든히 자신을 지켜주던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살아남았죠. 이들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것을 묵묵히 했습니다. 그게 생존의 이유였습니다. 생존의 단 한 가지 조건이었던 것이죠.     


누군가 나를 버린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나요? 매일 숨 쉴 새도 없이 일을 하는데, 나만 일이 안 풀리진 않나요? 수십 년간 일하던 곳에서 갑자기 해고를 당하진 않았나요? 가족보다 더 믿는 친구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진 않았나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 되뇌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진 않나요?     


어쩌면 우리는 두 늙은 여인처럼 서릿발 치는 허허벌판에 놓여 있을지 몰라요. 이 기분을 누가 알까요? 이 아픔을 누가 헤아릴까요.     


사와 칙디야크. 두 늙은 여자를 떠올려 보세요. 조금이나마 힘이 나지 않나요. 그들도 결국 살아 남았잖아요... 어찌 됐든 우리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힘이 들겠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건 해 봐야죠. 살 수 있는 데까진 살아봐야죠.      



다른 삶의 방식     


아. 소설의 마지막을 말해 볼까요. 두 노인을 버리고, 떠난 유목민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잘 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눈과 볼이 푹 꺼져 있을 정도로 수척해졌어요. 옷도 다 해어져 넝마가 되어 버린 지 오래에요. 많은 이들이 동상에 걸려 고생하고 있어요. 참. 인생이라는 게 그렇죠. 두 노인을 떼어버리면 잘 살아갈 것 같았는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힘겹게 살아가던 유목민들과 두 늙은 여자는 다시 만나요. 이젠 위치가 바뀌었죠. 잘못했다며 용서를 비는 유목민들과 살아남아 그들의 용서를 받는 여인들... 매몰차게 유목민들을 몰아내고(마치 자신들이 받았던 대우처럼), 여인들 스스로 살아가도 됐을 거예요. 이젠 여인들은 그들이 필요하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사와 칙디야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우리의 식량을 부족과 공유하겠소. 하지만 그들은 탐욕을 부리거나
우리의 식량을 빼앗아가려고 해서는 곤란하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걸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테니까.”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자신을 쫓아낸 부족들에게 굳이 왜 자비를 베풀었을까요? 똑같이 매몰차게 해야 되지 않았을까요. 아니, 더 독하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이라도 하며 내쫓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얻은 식량인데...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깊은 속내는 모르지만, 유목민들을 자비 없게 내몰았다면, 그들과 똑같다는 걸 사와 칙디야크는 깨달았을 거예요. 그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지요. 자기들은 이미 버려졌지만, 앞으로는 이런 불합리하고 반인륜적인 전통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어른들과 어른이 될 아이들에게 가르친 건 아닐까요.      


결국 이들은 다시 같이 살아갑니다. 추운 겨울을 죽지 않고 같이 살아갑니다. 아무 쓸모가 없어 버려져야 했던 두 여인. 그렇지만, 이들은 유목민들에게 양식을 전해 주고, 그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보였습니다. 유목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음과 삶 사이의 전장(戰場)에서 용감했고, 꿋꿋했던 사(sa). 사는 ‘별’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그 이름처럼 그녀의 행동은 후손들의 마음속에 계속 새겨질 겁니다. 영원히 사그라지지 않는 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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