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강사가 되고 싶어서
회원과 강사를 넘나드는 나의 수영 생활
벌써 수영강사로 4개월을 보냈다. 아직 짧은 시간이지만, 내 수영 인생이 많이 달라졌다. 연습량도, 연습하는 방식도, 시간도 변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수영에 대한 나의 애정과 수영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다.
달라진 것 중 하나는 수영을 더 공부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강사님이 시키는 대로만 수영을 했다면, 이젠 강사님이 그 드릴을 시키는 이유를 궁금해한다. 그리고 내 몸으로 그 이유를 찾는다. 사실 영법의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굳이 몸으로 찾지 않아도 각 드릴의 이유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내 몸으로 경험하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가르치는 회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한테는 쉬운 동작도 분명 비기너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운 동작일 것이다. 내 회원이 어떤 점에서 어려울지, 이 동작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일지 이해하고자 내가 가르치려는 동작을 먼저 해본다.
그리고 회원들에게 나의 어려움을 나눈다. "나도 배영이 특히 어렵다.", "나도 처음 배울 때 그 동작이 안 돼서 자꾸 물을 먹었다." 등등. 처음에는 회원들이 깜짝 놀라 했다. "선생님, 선수 아니셨어요?"
저도 사실 아마추어예요.
"저도 수영 시작한 지 4년 안 됐어요. 2019년에 처음 시작했어요. 중간에 코로나 때문에 쉬었고요."
사실 처음 이 말을 할 때는 약간 긴장했다. 혹시 강사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웬걸, 우리 회원들의 반응은 하나같았다. 다들 입을 모아 내게 한 말은 "대단하다"였다.
그중에도 인상 깊었던 반응은 너무 귀엽고 재밌어서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선생님, 그럼 저도 희망이 있어요?" 유독 자유형을 힘들어하던 회원의 말이었다. 초롱초롱한 눈은 '제발'을 외치고 있었다. 회원들에게 나의 고백은 의심은커녕 오히려 희망이 되었다. 요즘 회원들이 이런 말을 한다. '선생님은 우리 맘을 잘 알아요'. 그럴 수밖에! 불과 3년 전만 해도 나 역시 25m 지점에 도착하면 코 푸는 척 꼭 한 번 쉬었으니까.
'우리'반 만들기
비판적 페다고지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가르치는 자의 권위를 내려놓고 모두의 경험을 수업의 자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Hooks, 1994). 페다고지 교실은 '우리'의 경험에서부터 지식을 생산하고 이론을 만든다. 나의 '아마추어'한 경험은 우리 회원들에게 중요한 수업의 자원이 된다.
나의 경험을 공유하다 보니 회원들 역시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는 것에 스스럼이 없다. 요즘엔 같이 연습을 하기도 하고 물리적으로 같이 하지 않더라도 연습 상황을 나누면서 서로를 격려한다. 서로의 발전을 축하해주기도 한다.
회원들의 단톡방에 초대된 날 정말 기분이 좋았다. 내가 수영강사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다. 초급반에서 이런 소통을 보는 것이 쉽지 않다. 수영을 배우느라 여유도 없고, 회원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친해질라 하면 반 이동이 있어 소통할 새가 없다. 그런데 우리 반은 이미 말 그대로 '우리'가 되어 있었다.
강사라고 다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위에서 말했듯, 나는 회원들에게 내가 못하는 것을 드러내는 게 어렵지 않다. (예컨대 접영을 잘 못 한다고 했는데 궁금하다길래 보여주었다.) 이것은 분명히 내가 다년간 페다고지 훈련을 받아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강사로 활동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수업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해왔다. 물론 부족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고 공부하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수영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수법은 물론 수영 자체를 공부한다. 공부하고 내 몸으로 연습한다. 그러나 연습해도 되지 않는 동작도 있고 혼자 연습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특히 다이빙은 혼자 연습할 수도 없지만 강사님이 도와줘도 너무 어렵다. 바로 그 다이빙에서 이 고민이 시작되었다.
옆 상급반이 쉬는 시간에 다이빙을 연습하길래 나도 한 번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상급반 강사님은 흔쾌히 나의 다이빙을 피드백해주었다. 하지만 이후, 다른 회원들 앞에서 물어보면 강사로서의 권위를 잃을 수 있으니 지양해달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 말을 십분 이해한다. 어쩌면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게 익숙한 방식은 아니다. 가르치는 자가 갖춰야 할 권위란 무엇일까? 권위가 왜 필요한가? 권위란 무엇인가? 이 고민으로 한 주를 보냈다.
강사의 자질, 돌봄
벨 훅스는 가르치는 일은 돌보는(caring) 일이라고 말한다. 나는 고작 일주일에 세 번 생활체육으로서의 수영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그 과정에서도 내 회원들을 돌보고 싶다.
무엇이 어려운지, 왜 힘든지, 혹시 수업에서 불편한데 못 하는 얘기는 없을지, 지난주에 수업에 왜 빠졌을지, 이 수업 이후에 중요한 일정이 있지는 않을지 등등. 사실 이 모든 것을 물어보진 못 한다. 어쨌든 강사와 회원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신경 쓰는 것은 이들에게 수영 외의 삶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회원들을 일주일에 세 시간 남짓 만나지만 이 시간이 이들의 삶의 전부가 아니며, 수영장에서 만나는 모습이 이들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수영장에 나오기 위해 준비하고 조정하고 버텨야 하는 수많은 시간들, 이들 삶의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안다.
페다고지에서 말하는 돌봄을 실천하고자 회원들의 수영장 바깥 경험을 물속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게 각자의 상황과 경험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고자 노력한다.
내가 강사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권위보다는 나눔과 돌봄이다.
물론 비판적 페다고지가 권위를 지나치게 경계하고 쉽게 포기해버린다는 지적을 받는다. 교수자의 권위를 새롭게 정의하고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내가 강사로 일하면서 알아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역시 ‘좋은’ 강사가 되는 일은 어렵다. 사실 이 글도 좋은 강사가 되고 싶어서 쓰는 일종의 다짐이다.
우리 회원들이 나를 좋은 강사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수영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니까 좋은 강사가 되어야지. 그게 이들의 삶에 작지만 중요한 영향을 미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