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기라 함은 그날 하루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근 며칠 간의 일기를 한 번에 쓴다.
그냥 계속 가벼운 일기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왠지 내 아날로그 일기장에 쓰는 일기는 늘 그래왔듯 의미있는 이야기, 풍부한 감정 등이 있어야 할 것만 같고 내 노션에 쓰는 일기는 무언가 깨달음이라던가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게 있어야 할 것 같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기 전에는 위 두 일기를 내가 어떻게 쓰고 있는지, 굳이 왜 두 개의 일기를 쓰는지 몰랐다. 어렴풋이 대충은 느꼈지만 그냥 그날 쓰고 싶은 곳을 선택했을 뿐인데, 나름 내가 구분을 하고 있었나보다.
브런치는 더 가볍게 우당탕탕 하루들을 쓰고 싶다. 하루는 보내는 게 아니라 쌓이는 거니까 그 쌓이는 과정을 보고싶다. 그리고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도 내가 그날그날 느끼는 것들이 있는데 그 감정들을 공중에 흩어져 분해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쓰기의 욕구란 무엇인가.. 쩝.. 이에 대해선 다른 지면을 활용하겠다.)
25일 수요일 (음주 코칭 실패)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연구실 메이트들을 유혹했다. 오늘 술 마시자! 가자!
기말 페이퍼 프로포절을 다시 써야 한다는 신입생에게 내가 코칭해주리라 큰소리도 쳤다. 내가 얼마나 기말 페이퍼 주제를 잘 정하는지 아느냐며. 내가 이래 봬도 4학차의 짬이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와 연구분야가 매우 달라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응원과 약간의 가이드뿐이었다.
두 명은 음주의 유혹을 뿌리칠 의지가 없는 자들이라 순순히 내 제안에 응했다. 신입생 한 명은 프로포절 리젝의 상심이 컸는지 ‘정말 안 된다’고 연거푸 말했지만 결국 ‘한 시간만 하다 가겠다’로 바뀌었다. yay!
결국 네 명이 음주코칭 자리에 함께 하게 됐다. 우리 다 각자의 정해진 공부가 있기 때문에 술자리에 모인 시각은 꽤나 늦은 때였다. 한 시간만 더 하다 오기로 한 B를 기다리며 우선 셋이 모인 시간도 아마 9시쯤 됐을 때였으니 넷이 다 모였을 때는 아마 대략 11시 직전이었을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는 그때쯤 난 이미 얼큰히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어쩐 일로 먼저 술을 마시자고 했는데 날이 좋았던 건지 그날따라 술이 말 그대로 달았고 부드럽게 잘 넘어갔다. 랩메이트들이 무슨 일이냐며 놀라워하다가 오늘 왜 술을 먹자고 했는지,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캐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한테 진짜 이유는 없었다. 정말 단지 그냥, 진짜 그냥 먹고 싶었다. "그냥. 정말로 그냥. 샘들이랑 같이 술 마시니까 너무 좋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내가 좋아하는 메이트들을 한 자리에 모아 두고 맛있는 안주에 맛있는 술까지 있으니 계속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았다. 마침 그날 입은 티셔츠도 맘에 들었고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나의 생머리가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혼자 두 병을 돌파하고 세 병째 잔을 열었을 때 나는 '무슨 술을 꺾어마시냐'라고 꼬장을 부릴만큼 취해버렸다. 무슨 그런 아저씨 부장님같은 소리를 했담. B에게 코칭을 해드리라 호언장담했지만 B가 왔을 때는 K가 나한테 천천히 마시라며 술을 절반만 따라줄 때였고, B가 온 지 15분 만에 나는 식당 장의자에 누웠다. "나 10분만 잘게. 알지? 나 한숨 자고 나면 술 깨는 거?" 하면서. 10분은 한 시간이 됐고, 한 시간 뒤 나는 식당 변기를 청소하고야 말았다. 취한 와중에 청소까지 해냈지만 내 몸을 말끔히 가누진 못했나 보다. 식당을 나섰을 때는 메이트들의 팔에 들려있었다.
K는 B를, S는 나를 맡아 각자의 주취자를 챙겼다. 바로 지난주에 술 취해 길바닥에서 날 껴안고 엉엉 울던 S를 챙겼던 일이 마치 수요일의 프리뷰였던 걸까. 수요일 나는 우리집 빌라 계단에서 S 옆에 앉아 30분을 엉엉 울었다.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았는데. 난 술 마시고 우는 사람이 아닌데. 난 기분 좋아서 술 마시자고 한 건데. 인간의 무의식이란.. 프로이트와 사이가 안 좋은 나지만, 무의식의 발견만큼은 평가절하할 수가 없다. S는 "샘..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어떡하지." 하고 망설이더니 "한 번 안아줄까?"하고 덧붙였다. 엉엉 우는 주취자가 포옹을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냉큼 안겨서 코가 잔뜩 묻은 손으로 S의 등허리를 꽉 잡았다.
내 맘은 내 껀데 왜 나도 잘 모를까 내 맘을? 가끔은 다른 사람이 더 잘 알기도 한다. 나도 날 잘 몰라. 언제쯤 나를 알게 될까. 아이유 노래 가사 중에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날' 이란 고백이 있다. 25살에 그 가사를 썼던가. 난 28살인데 아직도 날 모르겠다.
26일 목요일(해장 학식)
목요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숙취에 시달렸던 것만 기억난다.
난생처음 4병 가까이 마신 다음날, 버스가 이렇게 위험한 교통수단이었나 싶었다.
그 와중에도 수영을 가겠다고 깝쳤지만 현명한 S가 나를 워워- 시키고 눕혔다.
목요일 학식이 점심은 뼈해장국, 저녁은 콩나물 국밥이라 마치 나를 위한 것인가.. 내가 전날 4병이나 처마실 것을 우리 영양사님이 아셨던 것인가하는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하며 학교를 걸어 다녔다.
뼈해장국 세 입까지는 우욱- 거리며 창밖 하늘을 보고 있었지만 역시 해장국은 이름값을 했다.
중요한 집담회도 있었고 수업도 있었는데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큰 문제없이 보냈지만 숙취가 내 하루를 잡아먹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또 다짐을 해버렸다. 이놈의 다짐병.. 뭐만 하면 다짐하고 지키느라 애를 먹는다.
이번의 다짐은 한 달간 술을 먹지 않기.. 사실 나한텐 힘든 일이 전혀 아닌데, 왠지 다짐을 하고 나니 되게 어려운 일인 것 같은 기분이다.
어쨌든 한 달간 알콜프리의 삶을 살리라. 현재 5일째 성공
27일 금요일(이놈의 서울대)
금요일엔 숙취의 여파인 것인지 하루 종일 소화가 안 됐다. 왠지 몸에 열도 나는 것 같고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아침 수영을 빠질 순 없었다. 수영하면 좀 나아질까 했는데 몸 컨디션이 더 나빠졌다. 그래도 기분은 좀 상쾌해졌는데 휴대폰을 여는 순간 기분은 더 안 좋아졌다. 오늘이 등록금 마감일이라니.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분납 신청을 했다. 돈이 없었고 어떻게든 생기지 싶어서 무모하게 신청을 해버렸다. 논문에 집중하겠다고 일을 줄여 수입이 절반이 된 내가 돈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어찌저찌 등록금을 납부하고 나니 허무하고 속상해졌다. 왜 공부는 이렇게 힘든 일일까. 나한테만 힘든 일은 아니지만은 누군가에겐 적어도 도피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게 배가 아프고 가끔 짜증이 난다.
몸도 안 좋고 기분도 안 좋았는데 마침 그날은 chris와 비디오챗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한 시간을 미루고 심신을 안정시켰다. 한 시간 뒤, 2주 만에 만난 chris에게 I’m not feeling well today로 인사를 시작했다. 한참을 대화하다가 보니 세상에, chris 머리가 많이 길었더라. chris를 만난 게 벌써 꽤 됐다는 걸 우습게도 머리를 보고 깨달았다.
금요일은 점심 약속도 저녁약속도 커피약속도 있는 날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연구과제 보고서를 두 곳에 제출해야 하는 날이었다. 도무지 이 모든 스케줄을 감당하는 게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커피 약속이 취소되어 재빠르게 총총대며 학교를 쏘다녔다. 우선 본부에 연구보고서 다섯 부를 내야 했는데 100페이지도 안 되는 이 보고서 다섯 부가 각종 지출결의서, 증빙서류와 있으니 꽤나 무거웠다. 그날따라 날씨도 너무 더웠다. 연구실에서 본부는 또 왜 이렇게 먼지. 본부 몇 층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2층 계단에 쪼그려 앉아 노트북을 켰다. 5층을 헤매다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번엔 사범대로 갈 차례였다.
내 나름 최적의 동선으로 사범대를 향했는데, 이놈의 학교는 왜 이렇게 넓은 것이냐.. 학교를 얼마나 다녔는데 아직도 학교 길을 다 못 외운 거냐며 스스로에게 잔소리를 했다. 분명 이게 사범대 건물이었는데 왜 갑자기 인문대인 거야. 뭐야 사범대 왜 안 나와. 하고 혼자 중얼중얼. 게다가 분명 인문대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사범대 옆문으로 나왔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사범대 연구해정실이었으므로 다시 행정실 건물을 향해 걸었다. 가까스로 행정실 건물은 찾았지만 연구행정실이 어딨는 건지 몰라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연구행정실 어디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경비선생님은 별 대답 없이 자리에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러더니 따라 오라는 고갯짓으로 날 끌고 갔다. 알려만 주셔도 되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내 속을 읽은 것처럼 갑자기 어디 대학에서 왔느냐고 퉁명스레 물으셨다. 사회대에서 왔다고 하니 선생님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아~ 우리 학교 학생이야? 어이고 대학원? 힘들지? 얼마나 남았는데?” 하면서 스몰톡까지 이어 가셨다. 이 온도차가 무엇인고 하고 있을 때 경비선생님이 말했다. “다른 학교 학생한테는 친절하고 싶지가 않아” 음.. 이게 뭘까. 내가 이 학교 학생인 걸 알고 친절해지셨으니 일단 감사해야 하는 걸까? 왠지 학부는 서울대가 아니란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절반만 친절하시려나 하면서.. 경비선생님까지 외부인을 배척(?)하다니. 이놈의 서울대. 아직도 이 안에서 이방인같다.
서류 작업을 도와주신 행정실 선생님이 되게 친절하셨는데 까칠한 사회대 행정실 선생님이 떠올라서 괜스레 서러웠다. 조교들이 일 좀 모를 수 있지 하면서.
지출결의서 작업까지 끝내고 나니 비로소 다 끝난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들어갈 때와 다른 문으로 나와서 그랬는지 건물 밖을 나올 때 마치 텔레포트 박스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다른 세상에 도착한 것 같았다. 새삼 학교가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맑은 하늘과 높은 나무. 푸르다 푸르러.
아뿔싸. 푸른 하늘을 찬미할 때가 아니었다. S가 사준 케이크를 연구실에 놓고온 게 생각났다. 토요일, 수요일 이틀이나 술취해 집에 쳐들어가 미안하다며 내 동생에게 전해주라던 케이크. 내 케이크였으면 그냥 미련없이 두고 왔을 것을, 굳이 내 동생에게 전해달라며 사온 케이크를 어찌 주말 내내 냉장고에 처박아두겠는가... 사범대에서 연구실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세상에 왜 이렇게 덥던지. "이놈의 학교는 왜 이렇게 넓은 거야"를 속으로 백번은 외친 거 같다.
연구실에서 케이크를 픽업하는 길에 B에게 주말 잘 보내라는 쪽지를 남겼다. 저녁 약속에 늦을까 터벅터벅을 종종걸음으로 바꿨다. 다행히 약속시간을 잘 맞췄지만 내 몸은 이미 녹초가 돼있었다. 휴대폰 건강 앱을 확인하니 이미 15,000보 이상을 걸은 상태였다. 거기에 아침 수영까지 했으니. 어휴.
어찌저찌 저녁 약속까지 마치고 집에 누우니 이미 가득했던 피로 위에 또 다른 피로가 몰려왔다. 등록금 낸 날은 왜 이리도 우울한지. 내가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 쓸 때 없는 고민을 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그래, 우울하게 있지 말고 가자. 어차피 저녁에 공부도 못 할 것 같아 보이는데 그냥 깔끔히 포기하고 가자. 주말에 공부 열심히 하자. 하면서 동작구로 총총 건너갔다.
만남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거 같다. 그 순간에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이미 지금의 감정이 채색돼서 바뀌었을 터. 기억나는 건 나한테 안기던 그 몸이 무거웠고 자연스럽게 하던 스킨십이 사실 불편했다. 그래도 배를 만지고 있으니 폭신폭신 기분이 좋았다.
새벽에는 몇 번이나 깼다. 눈이 번쩍 뜨여서 시계를 볼만큼 깼는데, 한 번은 3시 8분이었고 한 번은 6시 몇 분이었다. 시계를 보지 않고 눈을 껌뻑이던 게 두어번이고 바깥소리를 듣고 있던 게 두어 번이니 잠을 거의 못 자다시피 한 것 같다. 왤까? 이런 거에 쓸 때 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게 또 나의 습관이다. 이럴 때마다 그토록 싫어하는 프로이트를 찾는다. 프로이트가 무덤에서 억울하겠다.
이렇게 우당탕탕 수목금 3일을 보냈다.
아주 간단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내가 어땠는지만 쓰려고 했는데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손이 움직이는대로 쓰다 보니 긴 일기가 되어버렸다. 첨삭도 하지 않고 주르륵 써내려 왔다. 이런 느낌이 얼마만이던가. 논문을 쓸 때는 한 문장을 쓰는 게 그렇게 힘들고 괴로웠는데. 쓰기의 욕구가 샘솟는다. 갑자기 수영일기를 쓰고 싶어짐! 헤엄헤엄 수영일기를 브런치에 써보리라.. (졸업하고)
아무튼 수고한 나에게 박수를.
한 문장 정리: 프로이트를 너무 싫어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