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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탕

by 청천

나는 대화나 수업 중에 특이한(?) 단어가 나오거나 상황이 전개되면 그에 대한 비유나 어디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언급하며 나름 분위기를 바꾸어 보거나 웃음을 유발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내가 그러하지 못하는 경우라도 다른 분들의 그러한 이야기나 행동에는 그에 합당한 또는 그 이상의 반응을 보임으로서 역시 분위기 전환에 동참을 하거나 그 표현을 한 분의 상황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편이다. 수업 중이거나 대화 중에 던지는 짧은 한마디 농담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힘들고 지친 분위기를 전환시키는데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피곤한 하루 끝에 친구나 가족과 나누는 유머 한 마디는 우리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유머 또는 농담은 사람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고, 서로 간의 공감을 높이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 같다. 웃음이 터지는 순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더 가까워진다. 유머는 인간관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윤활제가 되어 단순히 친밀한 관계뿐 아니라 직장이나 새로운 환경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또한 유머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유연하게 만든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던 문제도 유머의 렌즈로 바라보면 의외의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한다. 농담과 유머는 단순히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우리를 더 강하고 유연하게 만든다. 우리가 농담과 유머를 통해 웃음을 나눌 때, 삶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세상은 조금 더 밝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집은 항상 너무 진지하고 농담, 유머에 대한 이해가 아주 부족하다. 내 탓도 크겠지만 천성도 일정 부분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한다. 아마 이 부분도 다음 생에서나...


나는 지금 우리 집 현황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일반적인 내용과 표현으로 풀어가고 있는 중인데 무슨 이야기인지 살펴보고 넘어가자. 지난 크리스마스 날. 출근을 하지 않던 준서가 저녁 식사 때 식탁에 앉아있는 나에게 이야기한다. 상록 엄마가 반찬 그릇 (자주 이러저러한 반찬을 만들어 가져다주고 김장도 해다가 제공을 한다. 음식이나 반찬 만들 시간이 없다 하여 기왕에 우리 것 만드는 김에 조금 더 만들어 가져다주는 것)을 가져가면 제대로 반납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내가 ‘그럼 중이 제 머리 깎기 힘드니 내가 대신 말해줄까?’ 하고선 전화기를 들었다. 해야 할 말, 해도 되는 말을 직접 하지 못하는바 도와주겠다고, 그러면서 실제로 전화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동작만 취했는데 그걸 보고는 푸르르 화를 내면서 ‘혼자 말인데 그걸 그렇게 반응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언성을 높인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돌아서 내 일을 하는데 한 참 지나서 다시 하는 말. ‘울화통이 터지네...’ 하고 다시 한번 화를 내는 게 아닌가? 그 대목에서 두말하지 않고 내 책을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아니 “기왕 전화하려면 급여도 올려달라고 해주지 그래?” 정도의 농담도 못하는 것일까? 하여튼 지금까지 대화를 하지 않고 지내고 있는 중. 4일째 되시겠다.


어제 그제 생각한 내용 가운데 이런 것.

1. 모든 일을 항상 진지하게 반응한다.

2. 아무리 이야기해도 학습이 되지 않는 네비처럼 안 되는 게 있다. 바로 유머 감각.

3. 너무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 가족 모두가 불편해한다.


法이 없이 사는 건 좋은데 너무 ‘지키다’ 보니 도무지 틈이 없고 불편하다. 세상에... 갈 길은 바쁜데 도로가 좁고 차량이 없다면 어느 정도 무단 횡단은 가능하지 않은가? 큰 도로, 차량 많은 도로, 고속도로 등 그런 곳은 당연 위험한 데다가 불법이니 그런 건 안 되지만 모든 횡단을 횡단보도가 있는 곳에서 하라는 것은 나로서는 숨이 막힐 때가 많다는 것.

항상 진지하게 임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태도는 목표를 높게 설정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있는 말과 행동만을 해야 한다는 것과 완벽을 향한 지나친 집착은 때로는 심리적, 실질적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하여 과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미 충분히 훌륭한 결과물에 미세한 수정 작업을 반복하며 중요한 시간을 소모하거나, 사소한 오류를 고치느라 전체적인 흐름이 지연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완벽함을 추구한 결과가 오히려 인간성과 따뜻함을 해칠 수도 있다.


혼자만 그렇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높은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 동료, 가족, 친구에게 완벽을 요구하면 상대방은 부담을 느끼고, 이는 관계의 긴장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태도는 타인의 입장에서 '내가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상대방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무언가를 완벽히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내려놓는 순간, 주변 사람들도 진정으로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빠진 내용이 한 가지 있다. 그런데 아마 이 내용까지 적게 되면 나중에 한 소리 듣게 되지 않을까 한다. 내가 상당히 싫어하는 반응 가운데 하나가 “그럼 니가 해 봐!” 또는 “ 너는 안 그러는 줄 알어?” “아이구, 똥 밟은 넘이 누굴 뭐래?” “00에서는 너만 잘하면 돼!” 등등의 대꾸인데 꼭 그 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아서 꺼려지는 단어. 執拗.

나이 들어가면서 알아가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람은 참으로 변하기, 바뀌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리 얻어맞고 읽고 반성해도 어느 정도 숨기거나 참을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건 타고난 피부색과 같다는 생각. 이는 멀리서 예를 찾거나 誤謬(오류)를 따져 볼 필요가 없는 것이 나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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