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통해 과거를 반추한다
어릴 적 나는 3명 중의 1명이었다.
같이 노는 친구 무리가 나까지 총 3명이었다. 그중 1명의 친구는 어릴 적 이사를 와서 놀이터에서 놀다가 알게 된 친구이다. 수줍음이 좀 있었던 탓에 엄마는 나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었고, 그 친구와 함께 피아노 학원도 다녔다.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집이 무척 가까웠고, 같은 반, 같은 학원을 다녔으며, 등하교를 같이했다. 그러다가 다른 한 명의 친구도 같이 친해졌고 셋은 하교를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셋이 집에 같이 갈 때 우린 함께였지만 나는 항상 혼자였다. 우린 분명 3명인데 나만 투명인간이 되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3명 중 1명이란 느낌을 받았나 보다.
어제 아이의 학교 앞에서 아이를 기다리는데 교문을 나서는 아이의 표정이 어둡다. 나를 보자마자 말한다.
“엄마, 나 이 수업을 할 때마다 머리가 아파. “
“그래? 왜 그러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엄마, 친구가 다른 친구랑 말할 때 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
아이의 말에 갑자기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떠올랐다.
고백하자면 나에게 있어 ‘친구’는 큰 결핍이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긴 했지만 나름대로 단짝이라고 여겼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 이후로는 먼저 친구에게 다가가는 법이 없었고,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는 안 좋은 사정으로 연락이 끊겼다.
나름대로 다른 면에서는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자부했는데 친한 친구 복은 없었다. 불우한 학창 시절이 내 자식에게는 되풀이되지 않길 기도했다.
그랬는데 아이의 저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슬퍼만 할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뇌로 생각했다. 그리고 관련 책을 찾아 읽고, 아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놀다보면 그럴 수 있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닐거 같은데?‘ 라던가, ‘그 나이 때 아이들은 그럴 수 있어 별거 아닌 일이야’ 하고 치부할 수 있는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날 닮아 예민한 아이가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감정을 느꼈을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며 만날 인간관계들에서 보다 더 건강하게 대응하는 아이가 되길 바란다.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아이는 그러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나를 더 잘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더욱더 단단해지려고 하고 있다. 내가 단단해져야 아이도 단단해질 수 있고,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방법과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므로. 단단한 엄마를 통해 너에게도 단단한 마음이 가 닿을 수 있기를.
그렇다고 부모가 나서서 아이가 겪는 갈등을 막아주거나 대신 해결해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요. 아이 스스로 부딪히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관계 근육을 키워가도록 옆에서 세심한 조언과 지지를 주어야 해요.
- 윤지영, <아이가 친구 때문에 울 때> 중에서